족보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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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이씨의 족보는 조선 명종 때 영의정을 지내신 동고 이준경 선생께서 처음 편찬 하셨다고 알려지고 있으나 임진왜란중 모두 없어져 버렸고, 지금까지 전해 오는 족보 중 제일 오래 된 것은 한음 이덕형선생이 서문을 쓰신 경술보이다.
위의 사진은 한음선생 친필로 경술보 서문의 일부인데 현대문으로 번역하면 아래와 같다.

廣州李氏族譜重刊序(己未譜)

昔予弱冠先考序癸酉譜手執使役於筆硯之間了了如昨而不肖無狀又當是役撫古之私不覺嗚째而轉眄之頃己逾四十餘星霜矣世代變遷子孫繁衍改修前譜固其時也門內參判容觀氏經營屢載積費心力事將就緖以病昏託于不뙈兩易星霜庚申丙癸之業復新甚大幸然此豈徒然觀察秉承氏以淹博之學加精詳之校竭찍心思且其冷手殘枰主財主務能擧其職如起空樓秘書丞鼎來氏之力爲尤多皆可書也己嗚呼是譜也與疎宗合同者親也與古規不同者時也凡爲我 生員公헝遁村先生之所自出者勉思所以尊祖保宗之義隨其時親親不在譜而在乎人焉此又不可不知也於是乎書

癸酉修譜後四十七年己未秋七月
嘉義大夫 宮內府 特進官 承載 謹序

광주이씨 족보 중간서 기미보(국역)

옛날 내가 젊었을 때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계유보(癸酉譜)에 서문을 쓰실 때 내 손수 필연간(筆硯間)에 조역(助役)하던 일이 어제 일 같이 뚜렸한 데,무상(無狀)한 불초(不肖)에게 또 이 일을 당하여 붓을 들으니,옛날의 사사로운 정에서 울먹임을 깨닫지 못하겠으니 눈 깜박할 사이에 사십 여 년이 지난 것이다. 세대(世代)가 바뀌고 자손(子孫)이 번창(繁昌)하니, 이제 전보(前譜)를 개수(改修)함에 알 맞는 시기이다.
종문(宗門)중 참판 용관씨(參判 容觀氏)가 여러 해 동안 일을 해 오면서 심력을 기울여 이제 일이 맺어지려 할 때 병혼(病昏)으로 재주 없는 나에게 맡긴 지 이년이나 지나서, 경술, 병진, 계유, 족보사업이 또 다시 새롭게 이루어지니 심히 다행이다. 그러나 어찌 저절로 되는 일이리오! 관찰사 병승씨(觀察使 秉承氏)가 해박(該博)한 학식(學識)과 정성(精誠)으로 상세하게 교정을 보시고, 마음 씀을 다하였으며, 또 절약하는 솜씨로 재무(財務)와 총무(總務)를 맡아 능히 소임을 다하여 허공(虛空)에 누각(樓閣)을 세우듯 한 것은 비서승정래씨(秘書丞 鼎來氏)의 노력이 더욱 많았으므로, 다 기록 해 둘만하다.
오호라! 이번 족보는 소원(疏遠)한 종족(宗族)과도 합동(合同)한 것은 친(親)을 주(主)로 함이요. 고규(古規)와 같지 않음은 시대(時代)의 흐름에 따르기 때문이다.
우리 생원공(生員公)과 둔촌선생(遁村先生)의 자손된 자로 힘써 조상을 받들고 종중(宗中)을 보존하는 의의(意義)를 생각할 것이요. 수시로 그때 그때 친(親)함에 따라서 수시로 족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종인(宗人)에게 달려 있으니, 이를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이에 서(序)하노라.

계유년에 족보(族譜)한 후 四十七년 만인 기미(一九一九)년 추(秋)七월
가의대부 궁내부 특진관 승재(承載)삼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