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릉부원군파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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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배(克培)ㆍ자 겸보ㆍ호는 우봉 또는 일봉

세종 임인년 1422년 출생하셨다. 공은 젊어서부터 도량이 넓고 실학에 힘쓰고 화려한 것을 피하여 성현의 경서를 성실히 믿고 또 깊이 연구하였으며 문경공 허조(許稠) 선생께 수학하였다. 문경공 허조 선생은 명재상으로 사물을 판별하는 학문과 견문이 높은 분으로 공의 기량이 보통이 아님을 알고 외손녀를 부인으로 취하게 하였다. 1447년에 생원이 되시고 그 해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이조, 호조, 병조, 형조 판서를 두루 역임하던 중 세 번이나 평안도 절도사를 지냈고 또 영남, 경기, 관서, 호서의 관찰사에서 의정부로 들어와 좌우참찬을 지내고 좌익공신에 책록되어 광능부원군에 훈봉을 받았다. 성종 을사년 1485년에는 우의정이 되어 육조(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선종)에서 여섯 임금을 섬기며 나가면 장군이 되고 들어오면 정승이 되어 한 몸이 국가 안위와 운명을 같이 하기를 30여년이며 마지막 관직은 영의정에 이르렀다. 나이 70이 되니 기로사에 들고 궤장을 하사받은 영광을 차지하였다.
성품이 엄숙하고 절도가 있었으며 화려한 것을 싫어하고 의복도 검소한 것을 귀히 여기고 경서와 사기를 특히 좋아하여 항상 주역의 강영과 통감을 노년에 이르기까지 손에서 떼어놓지 않고 읽었다. 또한 자손들에게 훈계하기를 겸손하고 공손함이 오직 처세의 도리라 하여 두 손자의 이름을 겸ㆍ공을 넣어 주며 가문과 번성과 세도를 스스로 조심하였다. 관직에 있을 때는 명석한 학식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본성이 어질고 밝아서 세인들이 존중과 두려움을 함박 받았으며 후세에 조선조 500여 년간에 걸쳐 365인의 상신중 10대 명상 중 한 분으로 꼽히게 되었다. 1495년 연산 을묘년에 74세로 별세하니 시로를 익평이라 하고 세사 부조로 모시며 산소는 서울 암사동 암사 수원지 앞이며 함허자 홍귀달이 공의 행장을 짓고 삼괴당 신종호가 신도비문을 지었다.
배위는 정경부인 경주 최씨이며 부군과 합장이시다.

- 장자 세충 안악군수 증 도승지
- 이자 세필 대사헌
- 삼자 세광 도승지 증 이조판서
- 사자 세주 별제 증 이조참의
- 오자 세량 참봉
- 육자 세공
- 칠자 세검
- 팔자 세훈 별좌
- 구자 세질

세충(世忠)

광릉부원군의 장자이며 서사로 안악군수를 거쳐 증직으로 도승지에 올랐다.
배위로는 숙부인 경주 최씨묘 두 분 합장으로 묘소 서울 암사동에 있다.

세필(世弼)ㆍ자 정보

광릉부원군의 차자이다.
성종 3년 병과에 급제하여 옥당에 뽑혀 선공감, 부제조 병조참판을 거쳐 대사헌을 이르렀다. 효자로 이름났으며 훗날 정승 재목이었으나 명나라 사신을 다녀오다 득병하여 별세하였다.
배위는 정부인 여흥 민씨로 효근의 따님이다. 묘소는 부평에 있으며 합장이시다

수공(守恭)ㆍ자 백평

광릉부원군의 손자이며 세충의 이자이다.
성종 16년 1486년 진사 급제하고 1488년 알성시에 장원급제하고 삼사를 역임하고 홍문관 전한에 올랐으나 갑자사화 때 화가 미치어 세상을 떠났다. 중종반정 후 무고함이 밝혀져 억울함이 풀려 증직으로 도승지에 올랐다. 배위는 숙부인 동래 정씨로 유현의 따님의 따님이다.
묘소는 충북 영동 합장이시다.

시무(時茂)ㆍ자 군우

광릉부원군-세충-수겸-이곤 이곤의 장자로 중종 27년 1532년에 출생하였다.
선조9년 1576년에 문과에 올라 통정 대부 장례원 판결사를 역임하고 임진왜란을 만나니 61세였다. 공은 노환으로 종군치 못하고 아들 정립으로 하여금 왕을 호송하게 하였다. 공은 광주 암사강상에 단을 쌓고 매일 조석으로 정복을 하고 왕이 피난한 곳을 향하여 울음으로 극진히 향배하고 무사환궁은 물론 국가 안위를 빌었다. 1592년 왜적을 만나니 노령에도 불구하고 정복으로 의연한 자세로 끝까지 충절로 순사하니 시종 하던 하리와 가족까지 6인이 순사하였다.
공이 저술한 역대통지 12권 등이 있으나 병화로 없어지고 전해 오지 못하고 있다. 그 후 증직으로 순충보조공신에 책봉되고 자헌대부 이조판서겸 지경연 의금부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겸 지춘추성균관사 세자 좌빈객 오위도 총부 도총관으로 봉군에 회성군이었으며 순조32년 증직을 더하여 의정부 좌찬성 판의금부사 세자 이사에 오르고 시호는 충민공으로 내려졌다. 배위로는 정경부인 전주 이씨이며 임진년 5월 11일 부군이 순사하자 강물에 투신자살하여 열부가 되니 열부정려가 내려졌다. 묘소는 서울 암사동이며 합장이시다.

정립(廷立)ㆍ자 자정ㆍ호 계은

광릉부원군의 5대손이며 시무 회성군 충민공의 장자로 태어났다.
문장과 도학으로 세상에 울렸으며 선조 9년 1576년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선조 13년 1580년 문과별시에 한음 이덕형, 백사 이항복과 같이 급제하였으며 공이 수찬으로 있을 때 선조께서 말하길「근일에 통감강목을 강의하고자 하니 나이가 젊고 재주가 있는 총명한 신하 몇 사람을 천거하여 자문에 대비하도록 하라」하였다. 왕명이 내리자 조정에서는 대제학 이율곡이 이덕형, 이항복, 이정집 세사람을 천거하니 이 세사람을 이때부터 세인이 삼학자라 일컬었다. 그 후 공은 한림 호당, 이조전랑, 응고, 전한에 보직되어 직제학으로 올랐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 공을 세우고 공은 부친 상사 순국을 당하여 집으로 돌아왔으며 복을 벗은 후 다시 소환되어 황해 감사에 제수되었다. 공은 난을 치른 후인지라 조정에는 질서가 극도로 문란하여 탐관오리가 들끓었으나 공만은 그 행장이 오직 책보따리 묶음 뿐이었다한다.
서해 유성룡이 비변사로 있을 때 말하되「재주있는 신하는 얻기가 어렵지 않으나 정립공과 같이 청백한이가 어디 있으랴」하였다. 이율곡 성 우계 문하에서 종유하여 학문 닦는 방법을 깊이 알았으며 성품이 강직하여 본래 욕심이 적어서 독서하고 저술하는 데는 항상 타인이 따를 수 없을 만치 부지런하였다. 공은 임진왜란 때 충성을 다하여 중흥을 이루어 평난훈추충분의 공신으로 광림군에 봉해졌으며 선조 28년 을미년(1595)에 40세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증직으로 영의정과 시호는 문희공으로 내려졌으며 저서로는 계은집이 있다. 배위는 정경부인 전의 이씨로 순인의 따님이다. 묘소는 서울 암사동에 있으며 두분 합장이시다. 문충공 백사 이항복이 묘지문을 지었고 문정공 우암 송시열이 시장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