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공파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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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군 세좌(世佐)ㆍ자 국언ㆍ호 한원

광성군의 장자이다. 세종 27년 1445년 출생하였으며 달성군 문충공 사가 서거정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며 김한훤, 정일두, 유뇌계, 성용제 등 제현과 도의로써 교유하였으며 세조 11년 1465년 생원 급제하고 아원 장악원 첨정을 거쳐 성종 7년 1477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직제학 도승지를 거쳐 대사간에 올랐다. 이어 종이품에 올라 영남, 경기, 충청도의 관찰사를 역임하고 성종 16년에 호조참판으로서 정조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그 때 사신으로서 품위를 잘 유지하였을 뿐 아니라 외교수환도 능하겨 명나라 조정에서 극구 칭찬을 받고 돌아왔다. 이 뛰어난 재질을 홍귀달이 왕께 아뢰니 왕은 기뻐하여 좌리공신 사등훈으로 광양군에 훈봉하였다. 이조 예조판서를 거쳐 의정부 우찬성 보국숭록 대부 판중추부사겸 세자이사에 올랐다 무오사화가 일어나가 공은 김종직과 교분이 있다 하여 파면을 당하고 숙부 광원군 아들 4인 조카 등은 갑사, 창성 등으로 귀양을 갔다. 연산 9년 인정전 양로연에 참석하였는데 연산군이 내린 술잔을 용포에 엎질러 음성으로 귀양을 갔는데 곧 돌아오니 왕은 거제도로 귀양가라는 명을 받고 귀양가는 도중 자살하라는 명령이 내려 경남 곤양 양포역에서 스스로 목매어 별세하니 당년 60세이다. 공의 아들 4형제도 목베어 죽이고 아우 세걸도 참형하고 숙부 광남군도 약사발을 내려 죽이고 이것도 부족하여 표골쇄풍형을 가하고 극배공의 아들 세광과 손자 수공도 참화를 당하였다. 공이 연산군의 생모 유비를 폐출사사 할 때 해방승지 허침은 화가 자신에게 미칠 것을 알고 일부러 낙마하여 그 일을 수행치 아니 하였으므로 공께서 대방체행 한 것이 화가 되어 무오사화에 이어 갑자사화 때 공이 참화를 당하게 된 것이며 아들 4형제를 비롯해 종숙질 모두 피화를 당했다.
당시 포악 무도한 연산군과 임사홍, 유순, 유자광 등의 모사로 인하여 모두 참화를 당하게 된 것이다. 연산군 일지에 의하면「근래 이극균, 이세좌 등 종족이 매우 번성한데다 권력 있는 자리를 모두 차지하고 있으니 장차 세력이 강해져 제거하기 힘들며 이것이 만연되면 춘추에 이른바 신하가 왕을 죽이는 때와 같이 안된다고 어찌 장담하겠는가? 그래서 이번에 광주이씨를 제거한 것이다.」라고 하였고 그 때 공의 시체는 들에 그냥 굴려서 천지간에 붙어 있지 못하게 하라고 하였다.
그 때 공의 시체는 종에 의해서 남모르게 산 속 깊이 묻어 놓았으며 중종반정 이후 억울함이 풀리어 증직으로 우의정에 제수되고 구현문액이 사액되었으며 임진왜란시 불타 없어 졌으며 세사 부조로 모신다. 배위는 정경부인 양주 조씨이며 조근의 따님이다. 묘소는 충주 괴산군 불항면 삼방리에 있다.

- 장자 수원 관 충청도사 증 병조참의
- 이자 수형 관 의정부검상 증 도승지
- 삼자 수의 관 홍문관정사 증 부승지
- 사자 수정 관 세자시강원사서 지제교 증 영의정

수원(守元)ㆍ자 선중ㆍ호 원제

광양군 세자의 장자이다.
세조 14년 1468년에 출생하여 김문경공 한훤선생에게 사사하였으며 형제분 4인이 모두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사헌부 감찰 봉상사 정수를 거쳐 충청도 도사에 이르러 연산 무오사화로 멀리 귀양갔다가 석방되었으나 갑자사화를 입어 4형제가 다 함께 참형을 당하였다. 중종반정 이후 병조참의에 증직되었다. 배위는 숙부인 남양 방씨이며 묘소는 괴산군 불항면 삼방리에 있다

- 장자 연경 관 홍문관교리 증 이조판서
- 이자 종경 생원
- 삼자 수의 관 홍문관정사 증 부승지
- 사자 유경 관 예조정랑 증 세자시강원보덕
- 오자 여경 관 증 부사과

수형(守亨)ㆍ자 가증ㆍ호 형제

광양군 세좌의 이자이다. 공은 백씨와 같이 김한훤에게 사사하였으며 학문이 매우 높아 성종 16년 17세로 사미시에 급제하고 이어 문고에 합격 한훤에 뽑힌 후 전랑을 거쳐 사성, 필선, 보덕, 장령, 집의, 수찬, 교리, 응교, 전한, 의정부검상, 사인 지제교 이르렀다. 연산4년 무오사화 때 귀양갔으나 풀렸는데 갑자사화 때 참형을 당하여 세상을 뜨니 향년 35세였다. 중종반정 후 억울함이 풀려 증직으로 도승지에 이르렀다. 배위는 숙부인 영동 김씨이며 김휘의 따님으로 묘소는 영동군 거문달동에 있다.

수의(守義)ㆍ자 존중ㆍ호 의제

광양군 세좌의 삼자. 임술8년 문과 병과에 19세에 급제하고 한림으로 뽑히어 홍문관 정자에 이르렀는데 무오사화에 유배되었으나 곧 석방되었다. 갑자사화 때 참형 당하였으며 중종반정 후 억울함이 풀려 증직으로 부승지에 이르렀다. 배위로 숙부인 경주 최씨이며 최수영의 따님이다.

수정(守貞)ㆍ자 간중ㆍ호 정제 또는 소한제

공은 김한훤에게 사사하였으며 영특하고 학문이 높았다. 김안국, 조광조와는 나이가 어리면서도 서로 의교하였다. 연산조 7년 생원시에 장원으로 급제, 진사 23인 중 일등을 하였으며 이어 문과에 합격하고 예문관 검열남상을 지내고 봉상사주부, 홍무관 수찬겸 동국교수를 거쳐 세자 시강원사서 지제교 이르렀다. 연산4년 무오사화가 일어나 일가문 모두 유배되었다가 풀렸으나 연산 10년 5월 13일 형제간 및 일가문이 한날 참화를 당하니 그 때 나이 28세였다. 중종반정 후 억울함이 풀려 증직으로 도승지에 이어 영의정 겸 세자사로 봉해졌다. 배위로는 정경부인 평산 신씨이며 신승인의 따님이다. 묘소는 양평군 양서면에 있다.

- 장자 윤경 관 병ㆍ형조판서
- 이자 준경 관 영의정

연경(延慶)ㆍ자 장길ㆍ호 탄수

광성군의 증손이며 광양군의 장손으로 수원의 장자이다.
성종14년 1484년에 출생하여 일찍부터 조광조와 도의로써 교유하였으며 학문과 도덕이 유림 간에 으뜸이었다. 중종2년 1507년 생원시에 급제하고 형조좌랑을 역임 현령과에 아원급제하여 사헌부지평을 거쳐 홍문관 교리에 올랐다. 중종 을묘 1519년 남곤, 심정, 홍경주 등이 조광조, 김진 등 많은 신진파를 몰아내 죽이고 남곤이 귀양보낼 사람 명단을 작성할 때 공을 첫번째로 써넣었는데 임금이 붓으로 성명을 지우면서「연경의 사람됨을 내가 잘 알고 있다. 귀양은 보내지 말고 관직만 파직하라」하였다. 그 후 공은 충주 탄금대 아래 용탄에 퇴거하여 산수를 벗삼아 한가롭게 지내었다. 인종1년 1545년 관직이 다시 복관되었으나 거절하였다. 당시 학자들은 탄수 선생이라 일컬었다. 공은 명종3년 무신 1548년 세상을 뜨니 향년 67세이다. 선조1년 1568년에 관직을 복관시켰으며 증직으로 이조참판과 광안군에 봉해졌다. 충주 팔봉서원에 배향되었다. 그 후 증직을 더해서 이조판서로 충정공으로 내려졌다. 배위로는 초취 정경부인 전주 이씨로 이성수 이지의 따님이라 무후이다. 재취 부인으로 정경부인 원주 이씨로 이연원 따님이다.

- 장녀 노수신 영의정
- 차녀 심 건 정자 증 영의정 - 삼녀 강유선 을묘사화시 피화

종 형제간에 얽힌 일화

탄수선생딸이 당혼이 되어 종제인 동고에게 중매를 부탁하였다. 하루는 사윗감이 있다 하여 종형제간에 혼사 이야기가 오가던 중에 공은 동고가 신랑감을 보았다하니 어련하겠는가 하여 일진을 택하여 대례를 치르도록 하였다. 그 후 혼례식을 마친 뒤 비로서 사위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그 때 공은 중매한 아우에게 물었다. 「사위의 관상을 보니 무자상이다.」하면서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이에 동고대감은 답하되「형님은 내 딸의 상은 어떠하기에 중매인을 나무랍니까?」하니 탄수선생은 안방으로 들어가 딸의 상을 자세히 살펴보니 딸 또한 무자의 상인지라 비로서 무릎을 치며 내 딸을 유자상의 얼굴을 택하였더라면 큰 실수를 할 뻔 하였다. 하고 잘한 중매라고 하며 종형제가 같이 웃었다. 그리하여 천정배필이 된 사위 호소재 노수신은 자식은 없었으나 당대의 호걸이며 관직은 영상까지 올랐으니 두 부부는 평생을 지냈다고 한다.

윤경(潤慶)ㆍ자 중길ㆍ호 숭덕재

연산 무오 1498년 10월 12일 한성 연화방에서 출생하였다. 수찬 수정의 장자이다. 갑자사화를 만나 조부와 아버지의 죽음을 당하고 공은 7살로 6살된 동생 동고 이준경과 같이 충북 괴산 청안으로 귀양갔는데 아우와 놀 때 아우가 거칠게 성을 내면 타일러 그 당시 야로가 보고서 봉황이요 기린이다 라고 일렀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나라가 바로 잡혀 비로서 귀양에서 풀려 서울로 돌아왔으나 고독하여 도움이 없이 고생스러움이 말이 아니었다. 모부인을 따라가 외가에 성장하였다. 10세에 취학하게 되었는데 외조부가 항상 공의 머리를 어루만지면서 모부인에게「이 아이는 재능과 도량이 있어 장래에 높은 벼슬에 오를 터이니 네가 조심하여 보호하거라」고 일렀다. 모부인 역시 엄하게 하여 효경, 대학 등을 몸소 가르치니 구독에 조금이라도 잘못이 있으면 종아리를 쳤고 공은 공손하게 종아리를 맞고 모친 뜻에 거슬리는 일이 없었다. 모부인은 힘써 타이르되「고대로 과부의 자식은 볼 것이 없으니 벗으로 사귀지 말라는 말이 있으니 너희들은 이미 아버지를 잃고 나를 따라 한동아리가 되어 살며 이지러져 부족하니 세상에 버림받기 쉬우니 마땅히 남보다 열 배는 더 학업에 힘써 너희집 명성을 떨어뜨리는 일이 없거라」고 훈계하였다.
1524년 모친상을 당하여 상중의 예를 다하고 죽과 채소로만 삼년상은 마치었다. 1531년 문과에 급제하여 교리, 사간을 거쳐 전설사수에 임명되었을 때 국경 변방을 지키는 장수들이 변방에서 일어나는 다툼질에 수비가 해이해져 있어 조정에서 특히 중신을 보내어 변경을 순찰한 결과에 순변사를 무관만으로 임면하는 것이 폐단이 되었다 하여 명망 있는 문신으로 임용하고져 결정되어 공이 임명되어 부임하여 평정하여 돌아왔다가 1541년 중종 신축9월에 의주목사로 임명되었는데 청백함이 짝이 없으니 은혜와 위엄을 아울러 실행하여 이름 없는 잡세를 모두 없애버리고 변경의 방어를 더욱 엄하게 하여 틈을 타서 군사를 거느리고 사냥을 하거나 군사를 조련시키며 금수를 조리시켜 군사들을 대접하니 부하들이 잘 복종하였다. 1544년 호조참의를 인종 1545년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을사사화에 이훈이 문초를 받을 때 공의 아들 중열이 연좌라고 말했기 때문에 중열이 숙부 동고에게 고하되「질이 장차 참형을 받게 되는데 장차 이 일을 어찌 하오리까?」라고 하니 동고는「우리 조ㆍ부선조들께서 갑자사화를 당한 것은 일생을 두고 가슴을 몹시 아프게 하는 일이었다. 오늘 이와 같은 사건은 부형이 당관으로 있으니 몹시 염려된다.
앞으로 집안 전체에 화가 이를 것인즉 네가 먼저 자수하여 죄를 기다리어 화가 부형과 집안에 미치지 않게 함이 가하다」고 대답하였다. 이 때 숭덕재는 정원에 있어서 배리를 보내어 편지로 대답하되「네가 평소에 이훈의 사람 됨됨이 상종할만한 사람이 못된다는 것을 알고도 나의 말을 듣지 않다가 이 같은 일을 당하였으니 이를 어찌 할 것이냐.

그러나 네 몸이 사형을 면하기 위하여 벗을 돌보지 않으면 안된다」하였다. 배리가 길을 서로 어긋나서 미쳐 보지 못하고 자수하고 말았다. 부자 숙질 간에 다 당연한 말을 하였다고 사람들은 말하였다. 단지 이이만은 동고의 잘못이라 하였다. 1546년 명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서 이기의 추엄함을 공박하고 마음이 불안함을 느껴 외임을 구하여 성주목사로 나가서 진심으로 백성을 다스리니 백성 모두 심복하여 운간 이사군이라는 동요가 있었다. 무신에 병으로 사임하고 상경하여 1549년 우부승지, 좌부승지에 승임되었으나 진복창 등의 무고로 문외로 쫓겨났다가 1550년 5월에 진복창의 범죄 사실이 탄로되어 처형된 후 1553년 4월에 대신이 공의 원통함을 아뢰어 6월에 형조참판에 서임되고 1554년 전주부윤으로 전임되었다.
전주지방에는 사족들이 많아서 뒤 공론하기를 좋아하고 헐뜯기를 잘 하였으나 형벌을 쓰지 않고 한결같이 성심으로 임하니 뒤 공론과 헐뜯는 것이 없어졌다. 을묘왜변시(1555)에는 왜적이 변경에 침입해져서 차례로 각 고을을 함락시키고 장차 영암으로 절박하게 들이닥치자 나라에서 공을 수성장으로 삼았다. 대게 공의 위명을 의뢰하여 흩어지고 무너짐을 누르게 함이었다. 공이 급히 정예한 군사를 뽑아서 거느리고 영암성에 들어가 웅거하고 부서를 호령하니 기율이 째이고 한사람도 군문에서 시끄럽게 떠들지 않아 군중은 숙연하였다. 이 때에 적의 선봉이 성 밑에 출몰한 자가 있어 공이 곧 군사를 출동시켜 성 위에 담 위에 오르니 적이 성을 포위하고 포로가 된 우리나라 사람을 성 밑에서 무참하게 베어 죽이면서 북을 울리고 날뛰고 큰 소리로 떠들어 시끄럽게 하여 성중은 동요되고 성 위의 군사는 흩어져 도망할 지경이었다.
공이 몸소 성을 돌아다니며 조종이 백년 동안 휴양함에 너희들은 편안하게 지낸 백성이다. 이것은 누구의 덕택이냐 변을 만나 은혜를 갚을 생각은 않고 목숨을 아껴 국은을 차마 저버리려고 하느냐 나는 원래 이 성의 주민이 아니고 국은의 두려움에 인연되어 한 번 죽고 나라의 은혜를 갚고자 하여 이성과 존망을 같이 할 것을 기약하는 것이고 너희들은 마땅히 나의 마음을 양해하여 기력을 분발하여 적을 죽이고 공을 세워 훈상을 얻도록 하라고 격려하였다. 군사들이 그 말에 감동되어 그 마음이 비로서 견고해져 한 사람의 위반자도 없었다. 당초에 이 난을 조정에서 듣고 우선 전주부윤 윤경을 수성장으로 임명하여 방어케하고 계속하여 도순찰사를 보내었는데 이 도순찰사는 공의 아우 준경이었다.
달려 금성에 이르러 머물고 격문을 돌려 이르되「순찰사가 이미 성에 들어 왔으니 임시로 있는 장수는 반드시 본 일터로 돌아가라」하였다. 군사들이 그 말을 듣고 소리 높여 말하되「우리들은 사또가 성지키는 것을 절대로 지지한다. 만일 사또가 아침에 나가시면 우리는 저녁에 흩어지리라」하였다. 공이 그 아우 준경에게 편지를 보내어 이르되「장수와 군사가 모두 성을 보존하여 굳게 지키게 하는데 내가 움직이면 어찌 될는지 알 수 없고 또 내가 항상 죽을 곳을 얻지 못할 것을 염려하니 갈 수 없다」하였다. 이윽고 왜적이 성밑에 몰려들어 공이 군사를 내어 분격하여 드디어 강한 왜적을 섬멸하고 끝끝내 한성을 보존하였다.

그 공으로 벼슬을 높이어 전라감사겸 병마수군 절도사를 제수하여 더욱 방어를 튼튼하게 하여 앉아서 호남의 인심을 안전케하였다. 명종병진 1556년 봄에 순찰사의 직함을 더 붙여 모든 장수로 하여금 변방의 경비를 전담케 하였는데 여름에 왜적이 중원에 해를 끼치고 돌아가는 것을 사로잡아 백명의 머리를 베고 또 중국의 포로인 20여명을 뺏어 임금에게 아뢰고 임금은 사신을 보내어 중국 조정에 아뢰고 포로인을 돌려보냈더니 명나라 황제가 몸시 기뻐하여 칙서를 내려 포상하여 수변장 이윤경에게 은량을 내려 충적을 보답하였다.
무오 1558년 8월에 임금이 함경도 북쪽 야인을 설유하여 귀순시킴에는 명덕이 있는 중신을 얻어 관찰사로 보내야 한다고 주장함에 따라 조정에서 함경도 관찰사로 갔다 와서 1560년 정월에 특별히 도승지를 제수되고 바로 이어서 병조판서에 올랐다. 6월에는 형조판서 7월에 갈려서 도총판에 제수되었다가 명종 신유 1561년 3월에 병으로 사임하고 한가히 몸을 보호하고 있을 때 항상 벼슬을 그만두고 한가하게 되어 불편함이 없이 잘 부양하고 있으나 일도 하지 않고 관록만 타 먹고 있어 미안한 마음이 끝끝내 있다고 말하였다.
1562년 평안도 관찰사를 갈게 되어 임금이 이조에 전교하되 양계 감사는 매우 중대한 임무인 즉 정2품관으로 선택하여 보내리라 하였다. 이조에서는 공을 천거하였다. 이 때 공은 오랜 병으로 파리하고 고달퍼 먼 변방지역에 말을 타지 못할 형편이었으나 조금도 사양없이 부임하니 평안도에 내려가서 해이해진 기강을 바로잡고 백성을 선무했다. 1562년 8월 10일 평안도 공관에서 운명했다. 향년 65세였다. 임금이 부고를 듣고 몹시 탄식하여 조정을 쉬고 전교하되 유장노재가 외지에서 가라앉아 없어졌으니 내가 마음이 아플 정도로 몹시 슬프도다 하고 영구가 지나는 각도의 감사에게 글을 내려 잘 호송하라 하고 또 별도의 상비와 제수를 하사하였다.
배위로는 정부인 고령 신씨이며 신종하의 따님이다. 묘소는 양평군 양서면 부용리에 있으며 합장이다.

준경(浚慶)ㆍ자 원길ㆍ호 동고

연산5년 1499년에 탄생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로 온 문중이 화를 당했으며 당시 공의 나이는 6세였다. 형과 같이 충북 괴산 청산으로 귀양갔다가 1506년 중종이 반정하자 비로서 서울에 돌아왔고 외조부에게 가서 자랐다. 모친 평상 신씨는 평산의 대성이다. 고려태사 신숭겸의 후손이고 판관 승연의 따님이다. 상서공이 공의 기국을 기이하게 여겨서 공의 대부인에게 부탁하기를「이 아이들은 먼 장래에 대기가 될 재목이니 조심해서 보호하라」하였다. 종형 탄수선생께 배웠고 나이 17,18살에 덕행이 성취하였다. 학궁의 과거공부는 탐탁하게 여기지 않고 오로지 성현의 학문에 힘썼고 예법으로써 몸을 지켰다. 임오에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서 다만 학업이 저명하였을 뿐 아니라 덕망이 벌써 많은 선비의 추앙하는바 되어 사람들이 그가 원대한 경지에 도달할 줄을 알았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대부인을 섬기는데 화한 안색을 즐겁게 하였고 매양 대부인이 병환이 있으면 몸소 약을 다리며 드릴 적에는 반드시 먼저 맛보았다.
신묘에 과거에 올라 승문원에 벼슬을 했다가 곧 사관으로 보임되었고 임진에는 옥당에 들어가서 정자가 되었다. 사인 이종익이 소장을 올려서 시사를 공박하고 김종직의 학문을 말하였는데 집정자가 크게 노해서 국문하기를 청했다. 임금이 이품 및 삼사를 소대시켜서 논의하니 모두 죽음이 마땅하다 하였다. 공이 소관으로써 말하길「이 사람의 논의가 괴벽하니 진실로 죄줄만 합니다. 그러나 임금께 소를 올린 것으로 죄를 당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닌 듯 합니다.」하였는데 김안로와 허황이 몹시 미워하여 파직 당했다. 계사에 재차 주서가 되었다가 다시 홍문관 저작, 박사로 옮겼고 부수찬으로 승진하였다. 야대에 나아가서 구수담과 함께 계하기를「안처겸의 옥사에 실정도 없이 귀양간 자가 많으니 석방하여서 천변에 대응하는 것이 마땅합니다.」하였다. 그때에 기묘옥사에 관련되었던 사람을 한창 배척하면서 공은 이연경의 종제이고 수업하였더라는 것을 지적하여 죄를 만들어서 파직되었다.
안로가 공에게 함혐하기를 머지않아서 빠른 시일 안에 또 화를 당할 듯 하였다. 공은 문을 닫고 글을 읽으며 날마다 일정한 과정이 있었는데 문장을 일삼지 않고 성리학에 힘썼다. 입으론 절대로 시사를 말하지 않고 발이 문밖에 나서지 않은지가 무릇 다섯해였다.
정유에 세 간신이 베어 죽임을 당하자 곧 서용되어 호조좌랑으로 제수되고 천거되어 이조에 들어갔다가 문학, 필선, 교리, 장령, 군기시첨정, 부응교, 보덕으로 옮겼고 아울러 지제교를 겸하였다.

중종께서 세자의 악문이 나날이 진보하므로 궁료를 널리 선택하는데 공이 경학에 넉넉하고 강의를 잘하는 줄 알고 뽑아서 서강원에 가장 오래도록 두었다. 그때에 인종이 동궁에 있으면서 학문이 성현의 경지에 이르고 고이 오래도록 연석에 모시었으므로 경학이 있음을 알고 날마다 세 번씩 접견하는 예와 고문하는 총애가 딴 궁료와 견줄 바가 아니었다. 글을 읽다가 의심이 있으면 비록 밤이라도 때 없이 소대하여 문득 자문하니 그 알아줌이 보통에서 뛰어났다. 공도 또한 스스로 군신간에 지기라 하였는데 신민에 복이 없어 궁검만 남아 있게 되었다.
신축에 직제학으로 승전되었고 오래지않아서 본직으로 부재학에 발탁되었다. 그 때에 소인의 환란이 다시 싹트고 온 조정이 입을 다무는 것이 버릇으로 되었으며 천번이 두렵고 좋아함과 미워함이 공변되지 못함을 극단적으로 논난하였다.
계묘년에 문신 정시에 공이 첫째로 뽑혀 계자로 진급하였다. 우윤, 대사성으로 진급하니 공은 여러 유생들에게 훈계하기를 「선비는 마땅히 글을 읽어서 몸을 닦을 뿐이다. 학궁이 어찌 시사를 논하는 곳이냐」하니 모든 유생들이 공을 신뢰하고 존앙하였다.
갑진년 중종이 승하하여 공이 사신으로 명을 다녀온 후 형조참판으로 제배되었다. 인종 초년에 공이 조정에 말하기를 「태제를 일찍 봉해서 인심을 안정시키는 것이 마땅하다」그때 공의 말대로 하였더라면 을사 기유년과 같이 화변이 있었겠는가? 공이 앞날을 내다봄이 그때를 당하여 모든 사람이 탄복했다. 여러 재상들이 윤원로를 죽이기를 의논했으나 박소일을 들어 이일을 중지시키었다.
을사에 이기와 임백령이 공을 꺼리어 외방으로 내치니 평안도 관찰사가 되어 백성 다스리기를 간략 엄정히하여 속관을 물리치고 올림이 공정하고 명백하니 온 백성이 공을 심복하여 따랐다. 무신년에 병조판서로 승차되어 여러번 사직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다음해에 벼슬이 갈려서 대사헌에 제수 되었다가 추부에 이임되었다. 경술년 5월에 이기와 진복창이 없는 일을 교묘하게 꾸미어 공을 보은현에 귀양보내었다. 조야가 다 놀라고 의정 심연원이 탄식하기를「이 사람이 높은 명망으로 이런 환난을 당한다.」하였다. 이기의 앞잡이 이무강이 앞장서서「이준경은 문무를 겸비해서 국가에 이롭지 못하다.」하여서 반드시 죄를 더하자 하였는데 권신들이 들고 일어나 말리니 이무강은 꾀를 더하지 못하였다.
신해년에 사면되어 북쪽으로 돌아왔다. 그해 겨울 지중추 부사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을 맡고 임자년 형조판서에 기용되었다. 이 당시 서북면에 장수 김수문이 강건너 변경에다 진을 설치하고져 하였는데 오랑캐가 원망하여 장차 난을 일으키고져 하니 조정에서는 이를 사전에 예방하고져 조정에서는 공보다 더 나은 사람이 없다하여 공을 천거하니 현지에 이르러 잘 살펴보고는 「큰일 날뻔 했다 거의 일을 그르칠 뻔했다.」하고는 진을 고치고 각지를 순방하면서 초무하여 위엄과 신의를 보이니 오랑캐의 정세가 곧 안정되었다. 돌아와 복명하니 대사헌에 제수되니 무릇 네 번이나 풍헌의장이 되었다.

겨울에 임금이 청백한 신하를 가려 잔치토록 하였는데 그 첫 번째가 공이었으나 공은 병을 핑계하고 참석하지 않으니 이 선택을 당한 것이 스스로 두렵게 여긴 까닭이었다. 갑인에 이조판서로 제수되니 공은 선임이나 승진시키는 데는 모두 당시의 공의와 공론에 따라 시행하니 당시 선조의 부친되는 덕흥대원군(덕흥대원군 부인은 공의 이성재종매)이 와서 관직재배에 대하여 요청하였으나 공은 「왕자가 사대부의 집에 다니며 인사를 청하는 것은 옳은 일이 결코 아니다.」하니 대원군은 몹시 부끄러워하였다.
을묘에 공조판서를 맡았다 형조로 이임되었으나 법을 적용함에 경중에 따라 인명의 생사가 달렸으니 공에게는 마땅하지 못하다 하여 사퇴하였다.
을묘 5월에 왜적이 호남에 침입하여 여러 고을을 함락시키고 장수를 죽이니 백성들이 몹시 두려워하였다. 좌우방어사를 갈라서 보내고 공을 도순찰사로 삼었다. 오랫동안 전쟁을 모르고 평화에만 잠겨있던 백성들은 갈팡질팡하여 싸움 한번 제대로 못하고 피난하고 공은 형인 이윤경 전주부윤을 순변사로 추천하고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영암성에서 왜적을 맞아 갈팡질팡하여 싸움한 번 제대로 못하고 피난하니 공은 형인 이윤경 전주부윤을 순변사로 추천하고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영암성에서 왜적을 맞아 독전하도록 하니 모든 곳의 성주들은 다 피신하였으나 윤경공 홀로 영암에서 왜적을 격퇴시키었다. 그 후 왕은 남정한공을 잊을 수 없다 하여 우찬성을 제수하고 병조판서를 겸직토록 하였다.
세 번이나 병권을 맡아서 장재를 가려 뽑고 병졸을 훈련시켰다. 공은 군율을 엄히 집행하고 병사를 친자식 돌보듯 하니 군정이 거양되었다. 당시 명장으로 이름 높았던 남치근등은 모두 공이 발탁한 사람이었다.
임금은 공을 세자를 보양하는 동궁관으로 특별히 제수하니 공은 사퇴하기를「신은 온화한 기색이 적고 훈도하는 방법도 모자라니 감히 원량을 가까이 모시어서 성취하도록 유도하는 일은 결코 하지 못합니다.」왕은 윤허하지 않으면서 종묘때에 인종을 보양하는 것 같아 하면 된다 하였다.
무오에 좌찬성으로 되었다 곧 우의정이 되니 사인 기대승은「조정의 표준이며 백관의 우두머리를 얻었다.」하며 기뻐하니 조정이 경사로 여겼다. 경신년에 좌의정에 승차되고 세자태부의 벼슬을 더 하였다. 공이 이미 정승자리에 올라서는 얼굴빛을 엄숙하게 하니 백관이 두려워 하였다.
위로 계옥하기를 다하여 날마다 바로 잡기를 일삼고 아래로 강령을 제시하여서 모든 일을 도왔다. 소격서를 혁파하는 것은 선조때에 정암 조광조선생이 힘껏 간쟁하였으나 되지 않았던 것이 지금와서 공이 윤허를 받으니 여론이 어렵게 되었다. 겨울에 병으로 사직하였으나 어찰로 붙잡았고 계미년 각질로 사직할 것을 청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소장을 올려 왕이 외숙인 윤원형의 죄를 물어 사정을 끊고 정형하도록 청하고 백관을 거느리고 정청하여서 사흘만에 윤허한 것은 공의 말을 따른 것이다. 또 원형이 시행한 나쁜 정사와 폐단을 많이 고치도록 청하니 모두 채납되어 시행하였다. 이 때 심통원 또한 정승으로 있었는데 척당의 번성함을 믿고 궁액의 권세를 펴서 이량을 쫓아내고 스스로 자신의 공이라 말하니 공이 매우 더럽게 여기고 그가 세력을 믿고 꺼림 없음을 미워하여 비록 같은 반열이지만 서로 대하고 말도 하지 않았다. 명종이 편찮을 때에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후사에 대한 말은 발설하므로 공이 정색하여서 꺽기를 「이것은 남의 신하로서 감히 논의 할 일이 아니다.」하였다. 병인년 천재로 인해 봉사를 올렸다. 임금이 재앙을 부르는 근본을 논하고 당시에 구차스럽게 합치는 것을 중화라고 분변하였다. 붕당을 배격하여야 태화를 이룰 수 있고 바로도와서 현체하여야 임금의 덕을 닦을 수 있었으며 바른 말을 용납하여야 선비의 기풍이 신장될 수 있다 하고 끝으로는 세자를 국본으로 미리 정하는 것이 재앙을 그치게하는 첫째라 하였다. 아울러 지극한 논의이며 큰 계획을 확정하니 종사가 힘입어서 현하게 되었으니 공이 임금을 섬김과 임금이 공을 알아줌이 지극하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을축년 영의정이 된 이후로 왕의 총애가 깊어 정묘년 봄에 사직하고져 했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6월에 명종이 몹시 위독하여지자 밤중에 공을 불렀다. 공은 임금의 병환이 심하여 질 때부터 평상 도당에 유숙하면서 관대를 풀지 않고 촛불을 밝혀서 기다리고 있었다. 소명을 받자 급하게 입궐한즉 왕은 공을 어상에 오르도록 하고 손을 잡으며 눈물을 흘리니 공도 또한 울면서 「저사를 정하지 못했는데 상감의 환후가 이와 같으니 속히 큰 계획을 세우십시오.」임금은 벌써 말을 못하고 안쪽을 향한 평풍을 두드릴 뿐이었다. 공의 뜻을 내전에 품하라는 말인줄알고 급히 서계할 시간이 없어서 바로 말로써 중전에 아뢰길 「상감의 환후가 이에 이르러 벌써 가망이 없습니다. 뒷일을 미리 정한 곳이 있으면 내전께서 반드시 함께 들은 일이 있을 것입니다. 까닭에 지금 주상께서 안 쪽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계하였더니 중전은 평풍안에 있으며 말하길「을축년 크게 위독할 때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로 정하였다.」하니 공은 딴 대신과 삼사장관을 명소하여 이 전교를 함께 듣도록 청하고 사관을 시켜 「덕흥대원군 셋째 아들이 들어와서 대통을 계승하는 것이 가하다.」라는 12자를 크게 써서 옥궤앞에 꿇어앉아서 「상감의 뜻에 따라 내전에 품한즉 내전의 교지가 이와 같으므로 감히 품합니다.」한즉 왕은 눈물을 머금고 머리만 끄덕일 뿐 하교는 없다가 인해서 승하하였다.
공이 곧 시위한 신하를 시켜 신하에게 세자의 의장을 갖추도록 하여 선조왕을 잠저에서 맞이하고 익실에서 상주 노릇을 하도록 하였다. 종사가 이에 안정을 되찾아 세자를 미리 정해둔것과 다름이 없었다.
이때 요행을 바라는 무리 있어 어가를 따랐는데 이름을 연서하여 두루 머리를 만들어 그때 한일을 기록하여 공을 책정한다는 말이 있었다. 이에 공은 소리 높여 불태우기를 재촉하였다.「어진 일은 대내에서 정한 것인데 신하가 어찌 그 사이에 간여하여서 감히 이런 말을 내는가」하니 다시 말하는 자가 없었다.

선조가 처음 즉위한 다음 공이 등대하여「마땅히 위로 종사의 중함을 생각하시고 아래로 백성의 의탁함을 생각하시어 무릇 시행하는데에 하나라도 마음 놓지 않으셔야 합니다. 임금이 말하고 잠잠하고 움직이고 정지하는 것이 국가의 흥망에 관계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왕께서 즉위하는 날을 당해서 먼저 이것을 경계로 삼아 종사를 보존하고 이것을 첫째 근본으로 삼으십시오. 바른말 하는 자를 가까이 하고 운운…
전하께서는 반드시 유신을 가까이 하고 성심으로 강학하시어 먼저 근원되는 것을 바르게 한 연후 일을 처결하시고 다스림을 하는 근원이 될 것입니다. 운…운…」하고 아뢰니 왕은 얼굴빛이 변하면서 답이 있었는데 매우 삼가고 꺼려하는 빛이 있었다.
가을에 차자를 올려서 을사년에 귀양간 사람 노수신, 백인걸, 유희춘, 김난상등 10여인을 소환 새정사를 돕도록 하였다. 을사년과 정미년에 원통하게 죽은 사람들에게 그 관직을 회복해주고 연좌된자를 방면하여 적몰된 재산을 돌려주도록 하였다. 공이 나이로써 치사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안석과 지팡이를 하사 받았다.
조광조의 관직을 추증하고 정몽주의 후손을 녹용하기를 청하여 광은 이에 따랐다. 대명회전에 이성계가 이인임의 후손으로 된 것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으나 200여년이 지난 후 공이 태사 허국과 위시량에 청하여 이일을 고치니 사람들은 이일이 공의 힘이라 했다. 또한 김굉필, 조광조를 문묘에 배향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대궐에 나가서 예닐곱번이나 간곡하게 아뢰었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여름에 가믈으메 늘 공궤와 부비를 줄이고 정미년 기유년 옥사를 신설하여 이기와 정언각의 관직을 사탈하도록하고 또 천재로 인해 포흠된 전곡을 경감하고 침체된 인사를 진작시키며 변방 경비를 단속시키고 옥송을 공평하게 다스리는 일을 네 가지로 조목지어서 아뢰었는데 말이 매우 간결하고 지당하니 임금이 모두 채용하였다. 또한 정공도감을 세워서 대납하는 폐단을 없애도록 청하여서 또한 윤허를 받았다.
선조 3년 영중추부사로 이직하고 영경을 겸하도록 하였다. 몸이 한가하게 되자 독서로 낙을 삼고 지낸지 삼년 후 여름 늦게 병들어 일어나지 못할 줄 알고 유자를 올리니 첫째로 제왕의 힘씀은 오직 배움의 큰 것이니 정자의 말에 함양에는 오로지 경을 쓰고 진학에는 치지에 있다 하였으니 전하의 배움이 치지의 공에는 반이 지났으나 그 함양공부에는 많이 미치지 못한고로 말씀하는 기상의 자못 과격을 발하여 아랫사람을 접견할 때 윤윤함이 적으니 엎드려 원하오니 공부를 더하소서. 둘째로 아랫사람을 대접함에 위의가 있음이니 신이 듣건데 천자는 목욕하고 제후는 황황하다하였으니 위의의 즈음에 가히 삼가지 않을 수 없으니 신하가 말을 할 때는 마땅히 넉넉한 모양과 예문 있는 얼굴로 비록 때로는 영걸한 기상을 드러내어 진발하고 경계할 것이나 일마다 드러내어 스스로 높이어 성현인 체함은 마땅하지 않으니 이와 같이 한즉 문무백관이 체재가 해이하여 과실을 구원함이 넉넉하지 못할 것입니다.

셋째로 군자와 소인을 분별함이니 신이 듣건데 군자와 소인이 스스로 정한 분정이 있어서 가희 덮을 수 없다하였으니 당의 문종과 송의 인종이 일찍이 군자와 소인을 알지못하고 사당에 끌려 능이 분별하여 쓰지 못하다가 드디어 옳고 그름에 현혹하여 조정이 편하지 못하였으니 진실로 군자라면 비록 소인이라 할지라도 직임을 분장하여 발탁해 쓰기를 두 가지 마음으로 하지 말 것이며 진실로 소인이라면 비록 사사로운 뜻이 있어도 물려 버림을 의심하지 말 것이니 이와 같이 한다면 어찌 조정의 정치에 어려움이 생기리오. 넷째로 붕당의 사사로움을 깨는 일이니 신이 보건데 지금 세상 사람들이 몸이 과실에 들것이 없고 일이 법칙을 어김이 없는데 말의 한가지만 합하지 않으면 배척하여 용납하지 않으니 높은 의논과 큰 언사로 당을 맺는 것을 높은 격치로 삼아 드디어 허위 풍속을 이루니 이것이 전하가 공정하게 듣고 아울러 관찰하여 힘써 이 폐막을 버릴 때요 그러하지 못하면 마침내 국가가 반드시 구원하기 어려운 근심이 될 것입니다.
부인네들을 물리치고 정침으로 옮겨서 동수하도록 명한 다음 곧 운면하니 1572년 향년 74세였다.
차자가 왕께 들어가자 임금이 애도하고 제수를 내리고 3일간 조회를 파하고 군신을 보내어 조문하며 관에서 상사를 비호하는 것을 예대로 하였다. 공이 별세한 후 선조께서는 청백리로 선발하고 시로는 충정이라 내리고 1610년 퇴계 이황 선생과 같이 선조대왕 문묘에 배향되었다. 인종 정해 1647년 사림들의 영립으로 구계서원을 설립하고 제향하였다. 유고 십권이 전해져 온다. 배위로 정경부인 풍산 김씨이며 참판 양진의 따님이다.
묘소는 양평군 양서면 소용리에 합장이시다.

약수(若水) 자 지원 호 우천

중종5년 1510년에 생원시에 급제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학문 연수에 전념하였다. 중종 14년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공은 조광조등 제현을 구하려고 태학생 150여명과 함께 궁궐에 들어가 농성을 벌이며 호송통곡하니 왕은 대노하여 하옥시킬 것을 명하니 태학생들이 앞을 다투어 투옥을 자원하였다.
이 때 공이 먼저 옥문을 열고 들어가며 모든 유생들은 죄가 없으니 놓아주라고 하며 전책임을 공이 짊어질 것을 주장하였다. 그 후 공은 신사 무옥사에 연루시켜 혹심한 고문 끝에 십여 년 간 유배 고초 생활끝에 별세하니 향년 46세였다.
이와 같은 사적이 기묘록에 기재 되었으며 그 후 사림들이 사당을 묘하에 건립하고 제향을 모셨다. 배위는 초취로 상주 박씨 재취 전주 이씨로 연산군 대흥면 우정동에 합묘다.

약빙(若氷) 자 희초 호 존함

세우공의 손자이며 자의 차자로 성종19년 기유 1489년에 출생하였으며 중종8년 계유1513년에 성균관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다음해 별시문과에 합격하고 한림호당에 뽑혔다. 중종13년 1518년 이조정랑에 올랐으며 이듬해 중종14년 기묘사화에 정암 조광조와 같이 서용되어 1539년에 한산군수로써 상소하여 단종과 연산의 뒤를 이어서 봉사할 것과 복성군 미를 설원해줄 것을 청했다. 대사간 신거관이 소장르 올리어 약방이 흉참하다고 논핵하여 잡아 국문할 것을 청하여 임금이 그 말대로 하려 하였으나 홍문관에서 반대하므로 파직하여 충주북촌에 퇴거하였다. 호를 준암이라하였다. 인종 을사 1545년에 좌통례로서 을사사화에 귀양갔었고 명종 정미1547년 벽서무옥에 이기가 공의 둘째아들 홍윤이 윤임의 사위라는 것을 트집잡아 적소에서 죽이었다. 선조 경오 1570년에 동고 이준경이 임금께 아뢰어 이약빙 기묘여현으로서 벼슬이 떨어져 촌에 있다가 정은각이 벽서를 무조하여 이기가 이것으로 인하여 일망타지 계획을 세워 약빙이 윤임과 연혼한 까닭으로 사사하고 적몰까지 당하엿으니 지극히 원통한 일이오니 관직을 회복하고 1545년 아우 약해와 같이 유배소에서 사사되었다. 배위로는 악계 홍씨이며 묘소는 중원군 동량면 대전

약해(若海) 자 겸용 호 수암

연산 무오 1498년에 세우공 손자로 약빙의 동생으로 태어났다.
중종 병자에 문과에 급제하여 무술년 영시에 발탁되어 명돈을 사사화시직제학으로써 충순당에 소대되어 공이 입다하는데 가흉들이 기망하는 죄상을 심히 말한 쥐목으로 나주목사로 내치되었다. 이듬해 병오년에 경원으로 귀양갔다가 정미벽서화가 일어나 중형 약빙과 나숙 나식등과 한날 사사당했다. 1570년 동고 이준경이 상소를 함으로 억울함이 풀리었다. 화엄서원에 배향되시다. 배위로는 숙부인 진주 소시이며 묘소는 황해도 연백안악에 있다.

세걸(世傑) 자 수언

광성군 문경공 극감의 셋째 아들로 세조 계미 1463년에 출생하여 광양군 세좌에게 몸을 의탁하였다. 성종 기유 1489년 생원 진사에 급제하고 1492년 문과에 급제하여 전적, 수찬, 정언, 병조좌랑, 호조정랑, 청정, 시정, 참교를 두루 역임 연산 계해 1503년 명나라 사신 김보 이진이 왔을 때 대접하는데 주선을 잘하여 그 직책을 완수하여 포상되고 첨지 중추부사에 승임되었다.
이듬해 갑자 1504년 에 사은부사로 명나라 조정에 다녀오자마자 참형을 당하였다. 향년 42세였다. 공이 대간으로 있을 당시 여러번 직언으로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 입묘하는 것을 반대하므로 연산의 미움을 받아 사사되었다. 중종반정 후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묘는 안의 덕유산에 있으며 증 정부인 정선 전씨는 훈련원 참군 수온의 딸이며 묘는 연승리 간좌이다.

- 장자 수진 관현감
- 장녀 정세호 관 판중추 외손 선조대왕
- 삼녀 윤극인 광 승문원 정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