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이씨의 족보는 조선 명종 때 영의정을 지내신 동고 이준경 선생께서 처음 편찬 하셨다고 알려지고 있으나 임진왜란중 모두 없어져 버렸고, 지금까지 전해 오는 족보 중 제일 오래 된 것은 한음 이덕형선생이 서문을 쓰신 경술보이다.위의 사진은 한음선생 친필로 경술보 서문의 일부인데 현대문으로 번역하면 아래와 같다.
옛날 내가 어렸을 때 할아버지를 따라 집안 어른댁에 갔다가 광릉세보를 보았는데 활자로 인쇄되어 있었으나 아들과 사위만 기록하고 외손은 기록이 없었다.
나는 그것이 너무 간단하여 한스럽게 여겼는데 자라서 옛사람들의 종법을 자세히 검토해 본 뒤에야 이 족보의 깊은 뜻을 깨달았으니 모두가 동고상공의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더라.
임진란 때 나라의 서책들도 다 불타고 없어졌거늘 하물며 족보라고 별 수 있었겠는가?
종중의 어른이신 이사온(李士溫)씨께서는 우리나라 여러 집안의 계보를 잘 아셔서 가승보를 아주 자세히 편찬하여 여러번 나에게 교정하기를 청했으나 그러지를 못했었다. 근자에 문소(聞韶*경북 의성 옛 이름) 이사군(李使君*수령의 다른 애칭) 사수(士修)씨가 기록한 족보 한권을 보내 왔는데 모두가 동고상공의 옛책을 그대로 적었고, 또 소씨(중국 성씨) 족보의 자세함과 간략함을 본 떴으니 전에 내가 교정하지 못했던 것과 그 뜻이 같고 믿을 수 있음을 한번에 알았으며 그 기록을 대대로 남길만하였다. 한두군데 틀리고 빠진 것이 있어 들은바 대로 고치고 바로잡아 그 전말을 서술하여 다시 보냈다.
아아! 우리 둔촌선조께서는 역적 신돈을 배척하시다가 화가 미쳐 멀리 피하셨으며, 참의선조는 소도지변(방원이 두 아우를 죽인 변란) 때 방원의 말고삐를 잡고 간곡히 말리셨으니 그 곧은 명성과 절개는 옛날부터 달리 비할바 없었으니 후손된 자들이 가문의 명성을 더럽힌다면 이 족보를 보면서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또 둔촌 이후로 서로 멀어졌지만 그 가지는 하나인데 원래 한 뿌리이면서 서로 화목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이 무슨 마음일까? 선조의 정을 생각하면서 이 족보를 보고 가문을 빛낼 마음이 생긴다면 그것이 바로 내가 지금 느끼는 감회로다
만력 사십일년 세재 계축맹하(1613年 여름)
효충 분의병기 익사 분충병의결기 형난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 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