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파종회안내
문경공파종회
파조행장
문경공 휘 극감의 묘소 전경

公의 諱는 克堪이요 字는 德興이며 號는 二峯이요 姓은 李氏니 貫은 廣州이다.
曾祖인 遁村先生의 諱는 集이요 祖의 諱는 之直이니 官은 直提學으로 淸白吏에 首選되었으며 學者들이 炭川先生이라 稱하였다.
考는 右議政으로 諡는 忠僖요 號는 楓崖이며 諱는 仁孫이니 以上 三世가 大顯하였으며 公의 兄弟 五人 이 다 卿相의 地位에 있어 封君의 勳이 있으니 이같이 名聲높은 門閥은 世上에 드문 일이다. 公은 英陵丁未 (一四二七)五月十三日에 漢城 校洞에서 태어났다.
公의 才性이 特異하여 三, 四歲부터 한 번 듣고 한 번 보면 잊지 않고 다 記憶하였다.

母夫人 盧氏는 別將 信의 女로 德行을 다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經史를 通達하여 아들 가르침을 옳은 방법으로 하니 公이 五歲때 부터 敎訓을 이어 받아 글 읽기를 독려치 아니하여도 점점 工夫에 益熟하더니 八歲에 바깥 書堂에 나가 여러 兄弟와 더불어 글 읽기를 부지런히 하니 사람들이 五能이라 稱頌하였 으며 그 中에서도 公이 으뜸이라 하였다. 十四歲에 詩文이 蔚然하여 甲子 進士科에 合格하고 바로 文科에 合格하여 集賢殿 正字에 拔擢되어 翰苑에 들었으며 다음 해에 藝文待敎와 侍講院說書를 拜하고 다음 해에 奉敎兼 司書에 昇進되었으며 또 博士 吏曹佐郞을 除授받고 丁卯 重試에 合格하여 知製敎에 뽑혔으며 이로부터 다른 職責도 兼하고 있었다. 正郞 司憲府持平 司諫院正言을 除授받음이 여러 번이고 戊辰(一四四八)에 修撰 校理 己巳에 司諫院掌令 庚午(一四五○)에 應敎 典翰으로 昇進하였 으며 이 해에 世宗임금이 昇遐하고 文宗임금이 嗣位하였다.

辛未(一四五一)에 賜暇湖堂하여 麗史節要를 編纂하는 箋을 올리고 이듬해에 病으로 벼슬을 辭任하고 忠州鄕盧로 돌아와 靜養한지 五年인 世祖二年 丙子(一四五六)에 舍人을 除授받고 조금있다가 尙州牧使로 赴任하여 治績이 뛰어나 通政大夫로 特陞하였다. 때에 公이 邊方의 警備强化에 對한 上疏를 올리니 朝廷公論이 李某는 文武를 兼備한 才操가 있는 사람이다. 可히 都觀察使로 任命하여 八道를 巡回 진압케 하는 것이 좋겠다고 上奏하니 上이 允許하였다. 丁丑 (一四五七)에 公이 慶尙監營에 있을 때 邊方의 警備를 堅固히 하고 百姓들을 잘 어루만지니 德化가 크게 行하여졌다.
十二月에 吏曹參議로 召還되었다가 바로 大司成에 遷任되었으며 戊寅(一四五八)에 國朝寶鑑의 編修를 完成하였는데 公도 역시 修撰官으로 參與하여 錫馬의 賞을 받으시고 또 佐理功臣 三等에 策封되었다. 公이 어버이를 爲해서 사양치 못하고 받게 됨에 上이 敎命을 내려 가로되 [오직 卿은 慷慨하여 世上을 經綸하는 뜻을 지녔고 磊落하여 얽매이지 않는 才質로 經筵에 오래 있어서 文章은 可히 나라를 빛낼만 하고 議論은 足히 임금을 바로 잡을만 하니 더욱 忠義를 분려하여 國家의 基盤을 빛나게 하라]하고 또 奴婢와 田畓과 白銀을 下賜하여 重히 여겼다.

十一月에 同副承旨를 拜하고 다음 해에 右副承旨 左副承旨에 昇進하였으며 六月에 右承旨 八月에는 左承旨 九月에 世宗임금이 撰集한 治平要覽과 醫方類聚等 諸書를 校正하라 命하니 公이 이에 上書하기를 世宗임금이 선비들의 學問을 높이는데 留念하여 옛 書籍을 根據삼아 編纂한 것은 資治訓義 綱目訓義 兵學要 三綱行實 左傳 韓 柳 文과 杜 詩註解小 絲綸集等 書가 한 둘이 아니다. 그러나 治體에 闕係되어 以後의 嗣王에게 龜鑑이 될 수 있는 것은 訓義二書와 治平要覽 이 이것이다. 印刷하여 頒布하기를 請하매 校正하라는 命을 받고 물러나와 考閱하니 註解가 失次되고 去就가 不精함이 진실로 임금의 諭示와 같았다. 이것은 鄭麟趾의 輕率하게 한 所致이나 그러나 이미 임금이 보셨고 또 李季甸과 金汶을 거쳐서 校正에 多少 틀리는 곳이 있으나 크게 錯誤됨이 없었으니 校正하는데 容易하게 進行할 수 있으며 資治通鑑은 司馬溫公이 編輯한 것으로 范祖禹와 劉恕가 이를 贊助한지 十年이 지나서야 完成하였으나 不精하고 또 그르친 곳이 許多하니 著書의 어려움이 이같은 것이었다. 治平一書는 先王이 留念하고 널리 蒐輯하여 編修한 것으로 비록 錯誤는 있으나 威烈王以上은 校正이 끝나고 宋나라로부터 以下는 新宋史와 君鑑에 실린바 大明事蹟을 參考하여 添入하면 圓滿한 大全에 손색이 없을 것이니 크게 들지 아니 하여도 十餘朔이면 可히 完成할 수 있으며 醫方類聚는 날로 쓰이는 데 적절하나 그러나 斤兩의 多少와 藥物의 寒溫을 조금이라도 그르치면 사람에게 크게 害로운 것이니 大臣은 醫書를 모든 關係있는 사람들에게 習讀케 하여 文理를 깨닫게 한後 方書를 熟知시켜 이들로 하여금 醫書를 校正하게 하고 선비로 醫書를 아는 사람을 選擇하여 校正을 監領케 하여 相互 檢察하여 信賞必罰主義로 實施하면 別途로 書局을 設置 아니 하여도 쉽게 成就하리라 생각됩니다 하니 王이 대답하기를 當然하다 卿이 아니면 해낼 사람이 없을 것 같으니 卿은 이를 委任맡아 實施하라 하였다.

庚辰(一四六○)에 宣慰使로 明나라 使臣을 迎接할 때 明나라 使臣인 張寧이 甚히 거만하여 弘濟院에 到着하여 말하기를 世子는 어찌 明詔를 奉迎치 아니하느냐 하니 公이 말하기를 君子는 사람의 갖추지 못한 것을 强要하지 아니하고 또 사람의 能하지 못한 것을 責하지 아니한다고 합니다.
至今 世子의 나이가 어려서 禮를 익히지 못하여 差誤가 있을까 두려워서 敢히 詔書를 奉迎치 못한 것입니다 하니 寧이 말하기를 世子의 나이 十餘歲라. 四拜卯頭하고 詔書를 받드는 것이 뭣이 어렵다 하느냐 하며 옛적에 成王은 八歲에 오히려 諸侯에게 朝會를 받아 天下를 두었는데 어찌하여 어리다고 하여 大禮를 폐할 수 있는가 하므로 公이 말하기를 大人은 구태여 固執하지 말라 하고 慕華館에 引導하였다. 그러나 寧이 또 脅迫으로 命令하기를 主上은 步行으로 詔書를 奉迎하라 하며 이는 高皇帝의 制禮라 하므로 公이 대답하기를 主上은 禁中에서 生長하여 걸음을 배우지 아니하였고 또 書에 이르기를 朝步은 自周한다 하였으니 이를 解釋하는 者가 말하기를 이는 곧 步輦이라 사람이 메고 가는 것이고 말을 멍에 하는 것이 아니다 하니 寧 이 步輦으로 奉迎토록 하였다. 寧이 公의 禮貌가 端正하고 言語가 조리있음을 보고 感歎하였다. 어떤 날 上이 下敎하기를 大學은 性理의 原理가 있는 學問이다. 初學者로는 理解하기 어려울 것이요.

世子 또한 理解하기 어려울 것이니 卿은 이 뜻을 잘 알아서 世子가 大學을 다 理解한 後에 다음 論語를 읽도록 함이 옳은 줄 안다 하며 御 製訓辭 十章을 내리시고 公이 그 끝에다 跋文을 지으시니 創業之主는 大功德이 있지 아니하면 하늘이 大命을 부여하지 아니하고 嗣業者는 先訓을 떨어뜨리지 아니하여야 하늘이 반드시 보호하고 사람이 반드시 愛戴할 것이니 이렇게 되면 큰 德이 거듭 빛이 나서 크게 繼承하고 크게 현저 할 것입니다.
殿下는 文敎를 崇尙하고 武備를 갖추고 飮食과 衣服까지도 素朴하게 하시고 또 官室도 好奢코저 아니하며 先王의 規訓을 조금도 어긋난데 없이 삼가히 지키시면서 慊慊히 百姓 한 사람이라도 그 살바를 얻지 못할까 念慮하시고 또 世子께서는 역시 英特하고 夙成하여 外人의 輔導를 期待할 것이 없으며 殿下는 臣의 옹졸하고 고루하며 아는것 조차 없는 것을 탓하지 아니하고 侍講을 命하고 또 어느 날 御製訓辭 十章을 世子에게 내리시며 臣에게 跋文을 命하기로 받아 三, 四번을 伏讀하니 글은 簡略하고 뜻은 멀고 커서 修齊治平의 道가 다 갖추었으니 참으로 聖子神孫의 千萬世 까지도 大訓이 될것이며 우리 世子의 英明한 바탕으로 이 訓辭를 입고 닦아 輕忽하지 아니하면 이른바 큰 德이 거듭 빛이 나고 크게 顯著하여 크게 繼承하는데 足히 말할 것이 없으리라 하였다.
五月에 都承旨 副提學에 昇進하고 八月에 上이 交泰殿에서 公을 引見하고 邊事를 論議할 때에 上이 口號를 公에게 받아 쓰게 하여 宗親과 諸宰에게 보이도록 하여 가로되 衣食이 足하여 無盡한 福을 누리고저 하는 것은 天子로부터 庶人RK 지 다 一致되는 것이다. 詩에 이르기를 [不素餐兮하니 各各 스스로 경계할 것이로다] 하였다. 公이 그 자리에서 詩를 지어 올리되 臣의 才識이 劣等하여 功列를 贊揚할 수 없고 조그만한 여와석이 어찌 靑天의 缺陷에 보탬이 될까 하였다.

이에 모든 臣下들도 和答해 올리고 終日토록 醉歡하였다. 九月에 吏曹參判과 兩館提學을 拜授하고 辛巳(一四六一)에 命을 받아 北征錄을 撰하고 또 序文하였다. 五月에 戶曹參判과 兩館提學을 兼任하니 上이 世子를 敎養하여 德性을 成就시키는 것을 온전히 公에게 맡기고 또 下敎하기를 世子의 書字가 나보다 지나고 또 文理를 잘 깨달으니 참으로 즐거운 일이다. 성종 15年 甲辰(1484)에는 大匡輔國崇祿大夫右議政(대광보국숭록대부우의정)과 兵曹判書(병조판서)를 겸직하시다. 다음 해에 명나라 翰林侍講(한림시강)인 童越勅使(동월칙사)가 來朝(내조)하여 弘濟院(홍제원)까지 이르렀으나 迎接(영접)의 예가 부족하느니 또는 중요한 명조의 登極(등극조)를 頒布(반포)하고저 함인데 칙사 대접이 너무 소홀하다는 등 공연히 트집을 부리며 慕華館(모화관)으로 들지 아니하고 이대로 명을 귀국하여 천자께 보고 문제 삼겠다고 위협하니 조정이 난처해 영접사를 바꾸어 보내 봐도 막무가내로 듣지 아니하므로 왕이 公을 불러 영접케 하니 그 때 勅使童越(칙사동월)은 公을 보고 언어, 자세 등 기품 있는 인품에 눌려 고분고분해지면서 자신들의 禮貌(예모)부터 정중히 하고 詔書(조서)를 바치었다. 이를 본 조정백관들은 모두 감복하여 과연 右相克培公(우상극배공)이라 칭찬했으면 왕도 公이 국사처리능력에 대한 신뢰를 더하여 대단히 기뻐하며 말 한필을 하사하였다. 수일 후 童越勅使一行(동월칙사일행)이 명나라로 돌아갈 때 백관들이 전송하였는데 동월칙사는 유독 公 앞으로 나아가 평하기를 조선에 재상 중 老成人(노성인)은 公 한 분 뿐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終日토록 외우고 읽는데만 치우치지 말고 두루 많은 冊을 읽혀 志氣를 增進케 하라 하였으며 또 下敎하기를 사람이 말하기를儲嗣를 敎養하는 데는 마땅히 小人은 멀리하고 君子는 가까이 하여야 한다는 것은 진실로 그런것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는 君子는 當然히 親하여야 한다. 하지만 小人도 可히 親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본다. 民間의 情僞와 盜賊의 情態를 다 파악한 後에야 무슨 일을 當하여도 能히 處決할 수 있다고 본다 하기로 公이 대답하기를 殿下와 같이 能通하여야 可히 行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아니하면 반드시 나라가 亡하고 聖德에 累가 될까 걱정입니다 하였다. 八月에 上이 世子에게 命하되 申叔舟는 너의 師傳요 李某는 너의 賓客이다. 술을 권하여라 하니 이에 世子는 술병을 들고 公은 잔을 잡아 술을 따라서 諸宰에게 나누어 주니 叔舟가 말하기를 원하옵건대 世子께서는 오늘의 있었던 일을 잊지 마소서 하니 上이 中外에 오늘의 奉平盛事를 傳하였다. 壬午(一四六二)에 資憲大夫에 昇進하고 廣城君에 封해지고 大司憲을 拜受 하였다. 八月에 正憲大夫 刑曹判書로 昇進하니 敎書에 이르기를 東宮僚屬은 法官을 兼任할 수 없으나 刑獄은 重大한 일이라 卿이 아니면 不可하다 하니 公이 이를 사양하다가 얻지 못하고 執務한지 十朔만에 囹圄가 空虛하니 世上이 廷尉가 平安케 되었다고 하였다. 癸未(一四六三)三月에 上이 思政殿에서 群臣가 더불어 宴會를 베풀때 上이 公에게 이르기를 卿은 世子師라. 世子의 나이 至今 어린지라 물을 東쪽으로 흐르고 西쪽으로 따면 西쪽으로 흐르나니 敎養 하는 데는 學問도 힘써야 되지만 弓失를 다루는 법도 알아야 한다 하여 드디어 활 쏘는 법도 익히었다.

五月에 親病으로 乞歸하여 侍湯한지 二개월만인 七月에 상고를 當하니 哀痛이 甚하여 몸이 쇠약할 정도로 禮를 지키기를 엄숙히 하며 喪服을 벗지 않고 죽만 마심을 보고 사람마다 病날까 위태로와 하더니 乙酉(一四六五)五月에 거듭 貞敬夫人喪을 當하여 執禮를 前喪과 같이 하고 廬墓三年을 마치고 戊子(一四六八)에 몸이 수척하여 病이 나매 그 해 閏七月二十七日에 忠州鄕第에서 亭年四十二로 卒하니 上이 聞訃하고 震悼하며 祖市를 停止케 하고 官에 命하여 葬事를 돕게 하고 世子께서도 祭官을 보내어 致祭하였다. 九月에 忠州未屹山 陶釜洞 戊坐에 葬禮를 모셨다. 配貞敬夫人 忠州崔氏는 廣興倉守 德露의 女요 觀察使 洵의 孫이다. 夫君을 공경하고 婦德이 조금도 어긴 일이 없으니 宗黨이 賢夫人이라 稱하였다. 丁未(一四二七)三月七日에 生하여 丁未(一四八七)八月七日 享年六十一에 卒하니 墓는 公墓에 합사하였다. 三子六女를 生하니 世佐는 吏曹判書 廣陽君이요 戊午士禍에 罷職되고 甲子士禍에 被禍되었으며 世佐는 京畿 監司요 世傑은 玉堂 同樞로 亦是 甲子에 被禍되었다. 中宗反正함에 兄 廣陽君과 더불어 顯職에 贈職되었으며 女 玄賁은 監察이요 李舜膺은 護軍이요 朴垠은 蔭郞이요 孫景祚는 蔭郞이요 宣彭孫은 主簿요 宋胤殷은 生員이다.

廣陽君은 生四男五女하니 守元은 南臺都事요 守亨은 議政府舍人이요 守義는 藝文檢閱이요 守貞은 弘文修撰이니 모두 寒暄堂門人으로 當世에 有名하였으나 甲子에 四兄弟가 모두 被禍되었다가 中宗反正後에 다같이 顯職에 贈職 되었으며 女 鄭洪孫은 經歷이요 趙永孫은 郡守요 梁潤은 縣監이요 鄭鉉은 主簿요 尹汝諧는 兵使니 사서가 甲子에 모두 杖流되었다가 放還되었으며 監司는 生一男하니 滋는 湖堂 博士로 禍를 當할 것을 미리 짐작하여 縱飮而死하고 同樞는 生一男二女하니 守震은 縣令이요 女 鄭世虎는 判中樞요 尹克仁은 弘文正字요 曾孫 廷慶은 賢良科에 薦되어 校理요 宗慶은生員이요 承慶, 有慶은 持平, 郡守요 餘慶은 蔭으로 司勇이니 守元의 子요 潤慶은 判書로 德望과 學問이 冠一世 이며 浚慶은 上相에 있으며 經術과 德行이 國朝相業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니 守貞의 子다.

若水는 生員이니 己卯士禍에 謫死하고 若永은 司僕寺正이요 若海는 直提學으로 兄弟가 謫所에서 賜死되니 滋의 아들이며 모두가 己卯, 乙巳 名賢이다. 嗚呼라, 公의 아들, 손자, 증손의 文學과 節義와 事業이 이같이 빛나는 것은 靈芝와 醴泉이 어찌 本源이 없을 것인가? 後世까지도 無窮함을 可히 알만한 일이다. 公이 富貴한 집에서 生長하여 젊은 나이에 영특하고 우아하여 朝廷에서 영광된 所聞과 좋은 평판이 中外까지 傳하였고 四十나이에 이미 八座의 벼슬에 올라 當世의 立朝事業이 輝赫하니 이는 好賢樂道의 天性에서 그러한 것이다.

그 道義를 講磨하는 데는 점필재金先生과 直諒之交가 있고 文章과 風采는 李樗軒과 徐四佳와 伯仲이 될 수 있어 士林의 屬望을 받았으며 朝廷에서 在職中에는 항상 교주직(世子를 가르침)에 있어 임금의 期許가 컸으니 그런 연고로 임금이 크게 슬퍼하며 李某는 忠誠으로 諫하고 德望이 높았으며 氣宇가 豪傑스러워 名聲이 드높더니 일찍이 卒하고 보니 可惜한 일이로다 하였다. 이는 斯文을 興起시켜 仁素의 城을 이룩하지 못하게 한 것인가? 또는 그 滿盈을 경계하여 餘祿을 後世에 돌려주기 爲한 것인가? 嗚呼라, 公이 沒한 二十餘年에 燕山亂政을 當하여 官爵을 追奪當하고 禍가 泉壤에 까지 미칠번 하였으며 子孫들이 四方으로 귀양가계 되어 能히 保全치 못하였더니 하늘이 禍를 뉘우치고 中宗이 反正하여 公의 집에 쾌히 昭雪함을 주시어 復興케 되어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左議政을 贈하고 諡는 文景公이라 내리시니 막힌 운수가 터지고 사라진 氣數가 늘어나는 理致를 막을 길이 없음이 이같은 것이다.

禍敗의 나머지 文獻이 散失되어 傳하여 온 것이 없더니 그 後孫 秉巡과 徽載가 정성과 힘을 다하여 王朝實錄과 野史에서 資料를 蒐輯하여 補闕하였으나 그러나 嘉言과 德行이 不備한 点이 없을 수 없으니 可惜한 일이로다.詩에 이르기를 奉先孝思라 하였으니 나 또한 諸賢 子孫들의 孝誠이 永遠토록 持續됨에 感動되어 사양치 못하고 삼가히 銘하여 曰

貴顯隆赫은 祖先의 仁을 積累한 것이요,
繼述紹承은 子孫의 새로운 德業이로다.
代를 이어 변함없이 이어온 것이 바로 그 사람이네,
二十전에 金榜에서 壯元하여 四十에 卿相位에 올랐구나.
君臣間에 論議함은 諸葛亮의 魚水로 比하고,
주자를 敎養함은 노기에 直溫을 사양할까.
忠君 孝親의 道다하였고 德도 높은데 어찌하여 促壽하였는고.
末屹山에 四尺封이 높은데 갖추어야 할 儀物 아직 다못하였네.
어진 子孫 있지 않았다면 어떻게 懿德을 顯揚하리.
내가 지은 이 銘辭 어찌 溢美할까 보냐.
風雨에 변함없이 千百年 누리소서.
宗正卿 李明翊 謹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