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이씨역사
족보서문

광주이씨의 족보는 조선 명종 때 영의정을 지내신 동고 이준경 선생께서 처음 편찬 하셨다고 알려지고 있으나 임진왜란중 모두 없어져 버렸고, 지금까지 전해 오는 족보 중 제일 오래 된 것은 한음 이덕형선생이 서문을 쓰신 경술보이다.위의 사진은 한음선생 친필로 경술보 서문의 일부인데 현대문으로 번역하면 아래와 같다.

대동보 서문
광주이씨대동보서(廣州李氏大同譜序) 정묘보(一九八七)

보서(譜書)란 한 씨족(氏族)의 역사(歷史)이며 통서(統緖)를 실증(實證)하고 소목(昭穆)을 명확(明確)히 하며 동조동근(同祖同根)의 후손(後孫)으로 하여금 조선(祖先)의 유지(遺志)를 길이 본받아 상호친목(相互親睦)을 도모(圖謀)케 하는 문헌(文獻)이다.

우리 광주이씨(廣州李氏)는 명종조(明宗朝)때 동고상공(東皐相公)께서 비로소 광능세보(廣陵世譜)를 수즙(修葺)하셨으나 임진병화(壬辰兵禍)로 회신 (灰燼)되고 그 후(後) 광해경술(光海庚戌)에 첨추 사온(僉樞 士溫) 시정 사수(寺正 士修)께서 속수(續修)하시고 한음상공(漢陰相公)께서 교열서문 (校閱序文)하신 경술보 (庚戌譜)가 제일(第一)오래 된 족보(族譜)이다. 그 후(後) 경종갑진(景宗甲辰)에 교리 승원(校理 承源)께서 수보(修譜)한 갑진보 (甲辰譜三卷) 정조(正祖) 병진(丙辰)에 대사간 상도(大司諫 尙度) 선전관 기양(宣傳官 基讓)께서 수집(修輯)한 병진보(丙辰譜七卷) 고종계유(高宗癸酉) 에 보국이판 의익(輔國吏判 宜翼)이조참판 용학(吏曹參判 容學)께서 편찬(編纂)한 계유보(癸酉譜|十七卷)그 다음 기미년(己未年)에 특진관 승재(特進官 承載)께서 편수(編修)한 기미보(己未譜|二十一卷)가 있으니 모두 다섯 차례에 걸쳐 간행(刊行)된 오대보(五大譜)인 것이다.

그런데 기미이후(己未以後)에 우금근(于今近)칠십년(七十年)이 되었으나 저간(這間) 민족(民族)의 수욕(受辱)과 사회(社會)의 혼란(混亂)으로 수족(收族) 의 길이 막혀 다만 각 파별(派別)로 수보(修譜)함에 그쳤다. 갑자년(甲子年) 봄에 대종회(大宗會)의 발의(發議)로 첨종(僉宗)의 향응(響應)을 얻어 대동보 (大同譜)를 발간(發刊)키로 하니 동관별보(同貫別譜)하는 율(栗) 석(石) 암(巖) 삼파(三派)도 동수(同修)하게 되었음은 다행(多幸)한 일이라 하겠으나, 국토분단(國土分斷)으로 재북족친(在北族親)이 수록(修錄)되지 못하게 됨을 유감(遺憾)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돌이켜 보건데 둔촌선조(遁村先祖)께서는 여말(麗末)에 문장지절(文章志節)로 일세(一世)를 울렸고 청백리공(淸白吏公)께서는 소도지변(昭悼之變)때 백인하(白刃下:시퍼런 칼날)에 고마극간(叩馬極諫)으로 백이숙제(伯吏叔齊)와 같은 높은 절의(節義)를 드러내셨으며 석탄공(石灘公)과 암탄공(巖灘公)은 신복(臣僕)을 거부(拒否)하고 청절(淸節)을 지키셨으며 동고상공(東皐相公)께서는 출입장상(出入將相)하여 위태로운 국정(國政)을 반석(盤石)같이 이룩 하고, 한음상공(漢陰相公)께서는 임란(壬亂)을 당(當)하여 재조지공(再造之功)을 세워 청사(靑史)에 빛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선조오백년(鮮朝五百年)동안 문학명위(文學名位)가 대(代)를 이어 훤혁(煊爀)하였으며 불억(不億)의 후손(後孫)이 포호사역(布濩四域)하고 있으니 이 모두가 조선(祖先)의 유택(遺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오늘의 우리는 이렇듯 훌륭하신 조선(祖先)을 모신 후예(後裔)들이다. 모름지기 그 유훈(遺訓)과 유지(遺志)를 받들어 윤리(倫理)의 도(道)를 지켜 친목(親睦) 의 의(誼)를 두터이 하고 근언신행(謹言愼行)에 힘써 조선(祖先)에게 누(累)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하여햐 함은 물론(勿論) 나아가 국가사회(國家社會)에 기여(寄與)토록 노력(努力)하는 바 있기를 바라며 끝으로 경향첨종(京鄕僉宗) 및 보소관계임원(譜所關係任員)여러분의 노고(勞苦)에 사의(謝意)를 표(表) 하는 바이다.

西紀 一九八七年 丁卯 十二月 日
대동보편찬위원회위원장(大同譜編纂委員會委員長)종욱(鍾郁)지(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