公의 휘(諱)는 長孫이요 子는 孟胤이며 廣州人이다.
高麗朝때 生員이신 諱 唐은 公의 曾祖이시고 祖父는 諱가 集이요 호(號)가遁村이시니 道德과 文章으로 世上을 울렸으며 圃隱, 牧隱, 陶隱등 여러 어진 분들과 더불어 道義로 사귀셨고 考의 諱는 之直이시니 學問이 높으시고 處事에 바르고 강직하였으며 벼슬이 寶文閣 直提學으로서 淸白하시고 높은
節義가 있었다. 어머님은 貞敬夫人 慶州李氏로서 知州事 벼슬을 지낸 元普의 따님이시다.
公은 孝誠과 兄弟間에 友愛가 하늘이 낸 듯 지극하였으며 家事를 다스리는데 法度가 있었고 處世를 어질게 하여 사람들이 모두 즐거워하고 따랐으니 이것이 그대로 後孫들에게 넉넉한 遺德으로 끼쳐진 것이라 하겠다.
아버님 直提學公 의 喪을 당하여 墓地를 골라 찾게 되었는데 進士曺漢弼이란 사람이 風水에 밝은 사람 으로서 山所자리를 보고 말하기를 이 자리가 참으로 좋아서 子孫들이 연이어 科擧에 오르고 顯達하겠으나 단지 거리낌이 있는 것은 長子에게 좋지 않다 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아우가 兄님에게 不吉하다면 어찌 入葬할 수 있겠소 하였으나 公께서는 내가 願하는 것은 단지 先親의 安葬일 뿐이지 달리 무엇을 꾀하겠는가 하고 그대로 葬事를 모시었다. 그런데 그 다음 해에 舍人公께서 世上을 떠났으니 과연 曺氏의 말이 證驗된 것이라 하겠다.
그 後 數百年을 경과하는 동안 長派後孫은 미약해지고 仲派 및 季派後孫은 많이 科擧에 오르고 벼슬길에서 顯達하였 으니 兩派後孫들은 公께서 行한 推榮의 德을 感謝히 여기고 欽仰하여 마지 않았다. 그런데 公의 墓所가 四百餘年이 지난 庚戌(一九七○)에 이르러 마침市街地改革(城南市上大院洞)으로 因하여 勢不得己 移葬하여야 할 地境이 되어 長派後孫들은 大宗中에 議論하여 曰 우리들은 비록 長派의 後孫이라 하나 멀리 千里밖에 있어 來往이 不便 하여 墓所를 直接守護하지 못하고 數百年동안 守護와 墓祭를 仲派諸族의 誠心에 委託하고 지내오다가 오늘에 이르렀은즉 公의 移葬事도 亦是 大宗中 여러분께서 치루어야 할 것이고 長派에서 單獨으로 決定지을 일이 아닐 것이므로 敢히 大宗中 여러분께 議論드리는 바라고 하였든 바 大宗中 여러 元老분들께서 舍人公께서는 孝誠과 友愛가 하늘이 내신 분 같아서 참으로 德이 많으신 先祖이신데 지금 그 山所의 移葬을 伯派에서 마땅한 곳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될 事情이라고 하였고 仲派와 季派에서도 舍人公의 그 孝誠과 友愛의 精神에 感動하여 遁村公墓所의 側近이나 提學公墓所의 側近에 移葬하여 도 좋다는 同議 承諾이 내려졌다.
드디어 이같은 承諾을 얻어 遁村公墓의 뜰 밑 卯坐에 터를 잡아 移葬을 모셨고 配位도 同封으로 모셨다. 이 곳 周邊에 族人의 犯葬이 있던 것은 宗議로 파가게 하고 이때부터 舍人公 의 萬年幽宅이 되었으니 公께서는 그 때를 기다린 것이고 墓자리는 主人이 있는 것이라 하겠다. 昌寧 雲谷書院에서 享祀되고 있다. 아들 克圭는 호조참의요 따님은 李益智宅 鄭之安宅郡守 金以石宅縣監 康袞宅信川君 徐貴祥宅司直 柳條宅上護軍 吳尙後 宅直長 高善慶宅 文科直講등 여덟 분이며 克圭의 男은 益壽 希壽 成壽振威縣令 세 분이고 成壽의 男은 姬奭秉節校尉 이고 나머지는 記錄하지 못한다.
銘하여 가로되
福을 아우에게 사양하고 自己는 榮華를 求하지 않았다네.
힘써 공부를 갈고 닦아 준총같이 달리니 그 이름 높았도다.
내 앞길이 바야흐로 열렸는데 어찌 壽가 그리 짧았는고.
아름답도다 壯하도다 비록 땅 속에 묻히여도 썩지 않으리.
光復後戊辰(一九八八)仲春2014-12-22
공(公)의 휘(諱)는 극규(克圭)요 자(字)는 공서(公瑞)이며 광주인(廣州人)이시다. 고려조(高麗朝)때 생원(生員)이신 휘 당(唐)이 공(公)의 고조(高祖)이시고 증조(曾祖)의 휘(諱)는 집(集)이요 호(號)는 둔촌(遁村)이시니 도덕(道德)과 문장(文章)으로 세상(世上)을 울렸고 포은(圃隱), 목은(牧隱), 도은(陶隱)등 여러 어진 분들과 더불어 도의(道義)로 사귀셨다. 조고(祖考)의 휘(諱)는 지직(之直)이시니 벼슬이 보문각직제학(寶文閣直提學)으로 청백(淸白)하시고 지절(志節)이 높으셨으며 고(考)의 휘(諱)는 장손(長孫)이시니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이시고 비는 안동김씨(安東金氏)이시다.
공(公)은 천성(天性)이 청렴(淸濂)하고 고결청백(高潔淸白)하였으며 겸양(謙讓)하고 정직(正直)하였으며 수신제가(修身齊家)를 근본(根本)으로 삼았다. 나라 일에 충의(忠義)로 섬겼으며 은애(恩愛)함은 다른 사람에게 미쳤으나 의리(義理)에 있어서는 법도(法度)에 맡게 하였고 맑은 덕(德)과 떳떳한 행신(行身) 에 그 누가 감복(感服)하지 않았으랴. 가문(家門)은 빛나고 벼슬이 연면(連綿)하게 이어졌으며 세상(世上)사람들이 광이팔극조정시대(廣李八克朝廷時代)의 말을 전(傳)해 오고 있으니 가(可)히 혁혁(赫赫)하지 않았던가. 공(公)께서는 연산조(燕山朝)때의 어지러운 정국(政局)을 맞자 관직(官職)을 사퇴(辭退)하고 해주(海州) 수양산(首陽山) 밑으로 물러나 임천(林泉)(숲과 물)으로 락(樂)을 삼고 산(山)에 올라 휘파람 불고 물가에 나가 시(詩)와 부(賦)를 읊으면서 후생 (後生)들 가르치는 것을 그 임무(任務)로 삼고 세상(世上)걱정을 버리고 나날을 보내시다가 세상(世上)을 마쳤다. 자손(子孫)들에게 훈계(訓戒)하기를 너희들은 과거(科擧)나 벼슬을 탐(貪)내지 말고 향리(鄕里)로 돌아가서 본분(本分)만을 지키며 처세(處世)를 잘하여라 하는 밀부유훈(密符遺訓)을 남겼으며 이 같은 떳떳한 유훈(遺訓)을 남긴 일은 그리 많지 않은 일이며 범문정공(范文正公)(南宋의 范仲菴:節義가 높은 사람)의 계훈(戒訓)이 있을 정도가 아니었는가?
공(公)의 조고(祖考) 직제학공(直提學公)께서는 소도지변(昭悼之變)(太宗이 일으킨 王子亂, 昭悼는 芳碩의 諡號)을 당(當)하여 태종(太宗)이 탄 말의 고삐를 잡고 간(諫)하여 가로되 백일(白日)이 청천(靑天)에 있는데 부왕(父王)앞에서 아우를 죽이는 일이 과연(果然) 어찌 된 일이요 하자 좌우(左右)의 병사 (兵士)들이 공(公)을 치려고 할 즈음에 태종(太宗)은 급(急)히 이를 멈추게 하며 말하기를 이 사람은 나의 옛 친구(親舊)이다 어찌 한便의 부탁(付託)을 받고 그러겠느냐 하였다. 변춘정(卞春亭)이 홀로 태종(太宗)에게 말하기를 이모(李某)의 충의(忠義)는 위로 일월(日月)과 더불어 빛을 다투고 아래로는 백이숙제 (伯夷叔齊)와 더불어 그 지조(志操)를 겨눌만하며 三代後千年을 내려오며 오직 이 한 사람 뿐이라고 하였다. 공(公)의 충절(忠節)이 또한 이와 같았은 즉 참으 로 가위(可謂) 이 할아버지에 이 손자(孫子)가 있었던 것이라 하겠다. 창녕(昌寧) 운곡서원(雲谷書院)에서 향사(享祀)하고 묘(墓)는 선고묘(先考墓)를 이장 (移葬)할 때 선고묘하묘좌(先考墓下卯坐)터에 이장(移葬)하였고 배위(配位) 해주오씨(海州吳氏)는 효민(孝敏)의 따님으로 동봉(同封)하였다.
아들은 익수(益壽), 희수(希壽) 성수진위현령(成壽振威縣令) 세 분이고 성수(成壽)의 아들 희석(姬奭)이 병절교위(秉節校尉)이고 희석(姬奭)의 아들 충경 (忠慶)은 참봉(參奉)이요 효경(孝慶), 성경(誠慶)은 감찰(監察), 우경(友慶)은 신창현감(新昌縣監), 제경(悌慶), 방경(邦慶)은 사과(司果) 여섯 분이다. 공(公)의 당시(當時)의 유적(遺蹟)과 전래(傳來)하는 문헌(文獻)에 의(依)하여 대략(大略) 우(右)와 같이 적었다. 이어서 명(銘)하니 왈(曰) 효도(孝道)와 우애(友愛)는 가문(家門)의 전수(傳受)이고 충성(忠誠)과 절의(節義)는 하늘로부터 록유(綠由)함이로다. 서산(西山)에서 지킨 청절(淸節) 나라생각 단성 (丹誠)이라. 수양산(首陽山)에 물러나와 십년세월(十年歲月) 보냈다네. 벼슬 버리고 자취 감추며 한가로이 임천(林泉)에서 정신(精神)기르었고, 자손(子孫) 에게 계훈(戒訓)남겨 독서(讀書)하며 밭 갈라 하였다네. 비석(碑石)에 무슨 말을 더 적으리 위대(偉大)한 자취 소연(昭然)한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