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朝初期(이조초기)에 청렴하고 곧으며 신의 두터운 중신 李公諱之剛(이공휘지강)은 字(자)가 仲潛(중참)이고 광주인이다.
조부의 諱(휘)는 唐(당)이며 고려초 國子生員(국자생원)에 올라 삼가고 경계하며 어진 행실이 있었다. 조선조 資憲大夫吏曹判書(자헌대부이조판서)를 증직하였고, 선고는 諱(휘)가 集(집)인데 고려 말기에 학문과 志節(지절)로 세상에 이름을 떨치고 포.목.도 三隱(삼은)이 도의로 사귀어 서로 공경하고 중히 여겼으며 세인들이 遁村先生(둔촌선생)이라 칭하셨다.
賊臣(적신) 辛旽(신돈)에게 거슬려 아버지를 업고 영천에 피하였다가 旽(돈)이 주살당한 후 출사하여 벼슬이 전교시판사에 이르고 議政府左贊成(의정부좌찬성)이 추종되었다.
선비 貞和宅主(정화택주) 영주황씨는 碩範(석범)의 따님으로 정경부인으로 추증되었으며 부덕을 두루 갖추고 단정하며 자애로왔다.
公은 공민왕 십삼년 계묘 한강 상류 川寧縣(천령현)집에서 태어나 타고난 성품이 비범하고 총명침착하며 일찍이 가훈을 받들어 효도와 우애를 겸비하였고, 형제분이 모두 부모의 분부로 圃隱(포은)선생 문하에서 배워 학문이 밝고 문재가 뛰어나므로 스승의 추장도 있었거니와 遁村先生(둔촌선생)도 시를 지어 권학하매 公(공)은 刻苦精勵(각고정려)하여 과공과 조예가 심오하여 陶隱先生(도은선생)이 "재상의 그릇이라" 찬양하였는데, 벼슬길에 나아가 군왕을 섬기기를 道義(도의)아님이 있었다.
세종임금도 믿고 중히 여겨 國初名臣(국초명신)으로 추대하였다. 삼가 왕조실록을 살피건데 洪武庚申(홍무경신)에 형과 같이 小科(소과)에 올라 蔭補(음보)로 奉先庫判官(봉선고판관)이 되고 壬戌(1382) 병과제오인으로 문과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의정부사인(정사품) 사헌부장령(정사품)을 지내고 태종7년 정혜(1407) 仁政殿(인정전)의 王親아래 문신의 중시때에 을과 제칠인으로 급제하여 화개, 전결, 노비의 하사가 있었고 예문관 직제학(정삼품)을 초배한 뒤 선공감정(정삼품)을 지내고 나아가 수원부사가 되고 형조우참의(정삼품)로 내직에 옮겼을 때 서북지방이 대한이었는데, 임금이 이 말을 들으시고 사신을 파견하여 백성의 고통을 살피려 할 때 공이 巡撫御使(순무어사)로 명을 받들고 지방에 나가 민정을 살핀 다음 창고를 열어 곡식을 나누어 주며 은혜를 베풀고 어루만지니 백성이 믿고 따랐다.
또 敬差官(경차관)을 외방에 파견하려 할 때 임금이 말씀하시기를 조신중에서 강직하고 명민하여 인자한 사람을 택하기 어려울 것이니 특히 공을 기용함이 좋겠다하여 충청, 전라 양도에 나갔을 때 호남지방에는 불법으로 백성을 괴롭히는 수령이 있음을 알고 각 고을을 편답하여 민정을 살핀 후 탐관오리의 풍습을 정화하였다.
吏曹左參議(이조좌참의)에 옮겼다가 太宗 14年 甲午(1414)年에 藝文官提學(예문관제학)(從二品)에 오르고 漢城府尹(한성부윤)으로 나가 사무가 번거롭고 바쁠 때에는 左酬右應(좌수우응)으로 결정함이 흐르는 물같았으므로 중인이 탄복하였다. 그 다음해 乙未年에 경상도 도관찰사로 나갔으나 곧 충청도 도관찰사로 옮겼으며 丙申年에 提調(제조)를 배하고 丁酉年에 刑曹參判(형조참판)이 되고, 戊戌年에 寶文獄事(보문옥사)로 인하여 咸吉道(함길도)都觀察使에 전보되었다가 왕이 원거리임을 근심하고 3일만에 戶曹參判兼 世子 左副賓客(좌부빈객)으로 불러 東宮(동궁:후일의 世宗大王)을 輔導(보도)케 하였다.
世宗 戊戌(1418)년에 戶曹判兼同知經筵事(호조참판겸동지경연사)를 배하여 經筵(경연) 박언 등과 大學衍義(대학연의)를 강론할 때 公이 맨 먼저 正心說(정심설)을 강의하면서「군왕의 학문은 마음을 바르게 함이 근본인데, 군왕의 마음이 바른 연후에야 백관이 바르게 되고 백관이 바른 연후에 만민이 바르게 되나니 마음을 바르게 하는 要旨(요지)는 오로지 이 책에 있습니다.」라고 강론한 후로 여러 강의제도가 완비되고 학술의 우두머리로 추앙되었다.
임금이 庶政(서정)에 대하여도 자주 하문할 때마다 公은 성심을 다하여 稟啓(품계)하였으며 혹 긴급회의로 三公을 부를 때에는 公과 卞春亭季良(변춘정계량)은 참여케 하였다. 이해 9월에 賀正副使(하정부사)로 명나라 서울에 다녀오자 왕은 삿갓, 신, 의복 등을 하사하였다.
이윽고 평안감사로 나갔다가 世宗 2年 庚子(1420)年에 戶曹判書(正三品)에 오른 후 어느날 入侍(입시) 하였을 때「풍년에 남은 곡식을 흉년이 들어 기근이 심할 때 허덕이는 백성을 구조하기 위하여 창고 수십 간을 지어야 되겠습니다」라고 청하니 임금이「흉년에 民弊(민폐)가 되고 더구나 농서철을 당하여 역사를 시작하고 싶지 않다」고 不允(불윤)하자 공이 사례하면서 아뢰기를「성상의 이 下敎(하교)는 漢文帝(한문제)가 露臺役事(노대역사)를 못하게 함과 같으니 원컨대 한 마음으로 시종이 여일하게 하소서」라고 아뢰었다.
다음해 7월 예조판서를 배하니 전후 호조판서 3번, 예조판서를 두 번 역임하였으며 62세때인 世宗 6년 甲辰(1424)에 議政府左贊兼大司憲을 배하여서는 政事를 논하고 백관을 감찰하여 기강을 振作하며, 풍속을 바로 잡는 일에 몰두하였다가 다음해 乙巳年에 병을 얻어 한직인 中軍都摠制(正二品)로 옮겨 7월에 致仕(치사)할 때 임금이 의약과 음식을 하사하며 요양토록 하였으나 병세가 점점 심하게 되어 世宗 9년 丁未(1427) 8월 12일 졸하시니 향년 65세이다.
世宗이 부음을 듣고 몹시 슬퍼하며 轍朝(철조)가 3일에 이르고 文肅(문숙)이라 시호를 내렸다.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함을 文이라 하고 마음을 지켜 결단함을 肅이라 한다.)
이 해 9월 25일 광주 고읍 수릿골 丑坐(축좌)에 禮葬(예장)할 때 임금이 제관을 보내 政祭(정제)해 가로되, 경은 마음이 곧고 신의가 두터우며, 몸가짐은 단아하고 언행이 방정하였노라, 일찌기 가훈을 받들어 학술에 精明(정명)하고 두 번 과거에 급제하여 文名이 뛰어나도다. 지혜는 넓어 중요한 요점을 터득하였고 재주는 온전하면서 말이 적었도다. 막중한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바쁜 임무를 거듭 맡았으며 여러 임금을 섬기면서 힘을 다하고, 명성과 공적이 많았는데 寡人(과인) 때에 와서 몸 바쳐 보필함이 더욱 지극하였다. 바야흐로 柱石(주석)같이 의지하고 蓍龜(시구)처럼 믿으려 했는데 근년에 이르러 갑자기 宿患(숙환)으로 사직하려 하기에 조섭에 전념토록 閑職(한직)에 있게 하였더니 병이 낫지 않고 더욱 침중하여 불의에 슬픈 부음을 듣게 될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노라. 조회를 정지하고 市場(시장)을 폐한들 어찌 余(여)의 슬픈 회포를 덜 수 있으며 시호를 내려 이름을 바꿔서 卿(경)의 貞勤(정근)함을 표하노라. 이제 禮官(예관)을 보내어 제사를 드리고 辭(사)를 陳述(진술)하노라. 아! 職任을 돋우어 隆崇(융숭)케 하려했는데 어찌 하늘은 이 좋은 輔弼을 빼앗아 갔는고?」 하였다.
公은 성품이 청렴하고 곧아 산업을 다스리지 않았고 이르는 곳이라 名聲과 功績이 있었다.
貞夫人仁同張氏(정부인 인동장씨)는 합폄하였다.
아들은 通仕郞孟孫 다음이 睿孫, 聖孫이고 딸은 朴好問(武科에 올라 知中樞)에게 시집갔다.
孟孫의 아들은 克齡인데 筮仕(서사)로 홍원교수를 지내고 연산 때에 平海로 피하여 세거하게 되었다. 朴好問의 아들은 부사 朴哲孫이다. 克齡의 아들은 宣敎郞時亭(선교랑시정)인데 將仕郞遵義를 낳고, 遵義의 아들은 天樞(천추)인데 中直大夫敎授(중직대부교수)로 학문과 명망이 있었고, 다음은 通任郞天柱이다. 天樞는 다섯 아들을 낳았으니 장자는 武科에 올라 萬戶를 지낸 廷華이고, 차자는 宣務郞으로 直長을 지냈으며 학문이 있는 廷茂(정무)인데 號가 琴臺(금대)이고, 다음은 廷蕃(정번), 다음은 廷芬(정분)인데 다 幼學이며, 다음은 通政大夫 廷芳인데 詩名이 있었다. 天柱의 아들은 參奉 廷蓂(정명)이고, 廷華의 아들은 景業이고, 廷茂의 아들은 栗峰道察訪承男이며 이하는 기록하지 아니한다.
아! 공은 총명한 자질을 타고 났으며, 先哲의 문하에서 聖賢의 도리를 배워 일찌기 登科 하였고 聖君을 잘 보필하여 각별한 은총을 받아, 가위 千載一遇의 계제에 40여년간 벼슬에 있으면서 君王의 행한 길을 君臣 간에 상의하고 外職에 옮겨서는 貪官汚吏를 숙청하여 백성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니 百姓들이 小伯(소백)의 甘棠(감당)노래를 불렀고 朝廷(조정)에 들어서는 빈 곳을 채우고 빠진 것은 보충하며 君王(군왕)을 옳게 보필함으로써 고기의 治業(치업)을 이룩하니 어찌 거룩하지 아니한가.
公이 하세한지 500여년이 지나고 후손이 溫井(온정) 먼 곳에 世居(세거)하는 데 心力(심력)을 기울여 銘文(명문)을 새기고 신도비를 세워 길이 길이 추모하고자 하며 이미 石材(석재)를 준비하고 有司(유사) 여러 사람이 行狀錄(행장록)을 가지고 와서 銘文을 나에게 청하니 내 晩生後學(만생후학)으로 어찌 감히 대인군자의 위대한 事蹟全貌(사적전모)를 알아내어 밝힐 수 있으리오. 그 뛰어난 공적은 國乘(국승)에 뚜렷하여 만인의 耳目에 환하게 비추는 데 무슨 군소리를 보탤 필요가 있겠는가? 굳이 사영하였으나 더욱 청함이 간절하기로 다음과 같이 銘文을 쓴다.
옛적 英陵朝에 重臣 文肅公은 圃隱 선생 문하에 배워서 학문 깊고 도덕 높았네.
일찍 벼슬길에 올라 이름이 闕(궐) 안에 떨쳐지고
朝廷에 들어서는 임금을 바른 길로 인도하며
經筵講論 때는 正心說을 主로 하니
백관이 儀表(의표)삼아 모두가 崇仰(숭앙)했고
나라에 大事있을 때 蓍龜(시구)처럼 믿음직하여
군왕이 몸소 불러 寡人(과인)을 보필하라 하셨네.
三朝(삼조)를 두루 섬겨 忠誠心 지극하고
哀悼祭文(애도제문) 下賜(하사)한 일 史記(사기)에 찬란하네
銘文을 돌에 새겨 길이 後世에 전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