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公)은 우의정 휘(諱) 충희공(忠僖公)이신 인손의 삼자로 세종신해(1431년)에 태어나시어 문종원년 신미 (1451년)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세조2년 병자 (1456년)에 문과에 급제 군기사(軍器寺) 직장(直長)을 거쳐 세자우정자(世子右正字)가 되셨으며 사헌부 지평과 의정부 사인이 되시어 서연관을 겸대 하셨으며 홍문관 전한으로 경연 시강관을 하시고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을 거쳐 홍문관 응교와 의정부검상(議政府檢詳)이 되셨다. 세조 13년(丁亥 1467년) 이시애의 난에 정략장군(定略將軍) 부호군(副護軍)과 선전관(宣傳官)을 겸하게 하시며 격일로 입시케 하니 찬획한바가 크므로 그 공으로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오르셨으며 우부승지(右副承旨)를 거쳐 좌승지(左承旨)로서 경연 참찬관(參贊官)을 겸대 하셨다. 예종즉위 (戊子 1468년)에 수충보사 정난익대(輸忠保社 定難翊戴) 2등 공신에 책록되어 광천군(廣川君)에 봉해 지셨으며 가선(嘉善)의 품계에 오르셨고 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에 특제 (特際)되시고 자헌대부 이조판서 직을 수행하시면서 국가의 경비의 절제를 위하여 횡간식례(橫看式例)를 제정하셨는데 이것이 지금의 예산서와 같은 것으로 수입과 지출이 일목요연하여 재정운영에 차질이 없게 되었다. 성종 2년 신묘 (1471년) 순성명량홍화좌리공신(純誠明亮弘化佐理功臣)에 책훈(策勳)되고 호조판서로 가자 되셨다. 강원 순찰사로서 백성의 질고를 복명하고 구휼할 계책을 세웠으며 이어서 전라도 관찰사로서 왜구의 침입을 진압 하셨으며 의정부 우참찬과 자헌대부 병조판서로서 서.북 양계에 오랑캐 출목을 평정 하는 공로를 세우셨다. 황해도 진휼사 로 명(命)을 받아 백성을 전활(全活)케 하시었다. 1483년 (성종14년) 정헌대부 병조판서(兵曹判書)에 가자 되시고 숭정대부 판중추부사 겸 동지성균관사(崇政大夫 判中樞府事 兼同知成均舘事)를 하시면서 문조를 중수하고 문풍을 크게 진작하셨으며 왕명으로 대전속록(大典續錄)을 찬정(撰定)하여 법전의 미비가 없도록 하셨으니 말년에는 성균관(成均館)을 맡아 유생을 가르치시던 중 미병(微病)으로 성종25년 갑인 (1494) 3월 25일에 64세로 영면에 드시니 시호를 공장(恭長)이라 내리시고 부조로 모시며 후에 대광보국(大匡輔國) 숭록대부(崇錄大夫) 의정부(議政府) 영의정(領議政) 겸 광천부원군(廣川府院君)에 추증되셨다. 배위로는 정경부인 청풍김씨(貞敬夫人 淸風金氏) 이시며 묘소(墓所)는 합장하였고 5남 3녀를 두시었다. 공의 묘소는 원래 광주군 돌마면 탑동에 계셨는데 분당 신도시 개발로 인하여, 1991년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지월리 산 37-1로 천봉하였다.
공(公)은 성종2년 신묘년 (1471년) 6월12일에 광천부원군의 5형제 중 장자로 태어났으며 천자(天資)가 준수하고 총명이 뛰어나며 언행이 조심스럽고 학문이 조성(早成)하여 나이 15세에 경사(經史)에 통하고 문장도 능하여 중종2년(정묘 1507)에 문과에 급제하고 옥당(玉堂)에 뽑혀 홍문관과 괴원[槐院 : 승무원의 이칭(異稱)]을 거치면서 춘추관과 경연관을 겸대하였고 형조정랑(刑曹正郞)으로 법을 공정하게 집행하고 홍주(洪州)목사, 공주(公州)목사를 지낸 다음, 내직(內職)으로 선공감정(繕工監正)에 오르셨다.
중종15년(경진 1520년) 3월3일 향년 50세에 천명(天命)을 다 하셨다.
배위(配位)로는 숙인 평산신씨(사정 승참의 따님)이며 묘소는 본래 광주군 돌마면 탑동에 계셨는데 분당 신도시 개발로 인하여 대한민국 신미년(1991년)에 광주시 초월읍 지월리 산 37 선고(先考) 묘하(墓下)에 천봉(薦奉) 하였다.
자녀는 6남 1녀를 두셨다.
광천부원군의 증손(曾孫)이시며 공(公)의 조부(祖父)는 선공감정이신 세홍(世弘)이시고, 부(父)는 복명(復命)이시다.
초명(初名)은 인수(麟壽)라고 부르셨으며, 공께서는 조산대부 청도군수를 지내셨고, 증직(贈職)으로 참판(參判)에 오르고 보조공신에 올라 광흥군(廣興君)에 봉해 지셨다.
공(公)께서 선조 병오년(1570년)에 청도군수로 재임(在任)시 영천의 시조(始祖. 唐) 묘소(墓所)가 피폐(疲斃)하여 안타깝게 생각해 하시며
1) 시조(始祖, 唐)묘비(墓碑)를 건립(建立)하셨으며
2) 동제각(묘사(廟祠)을 신축(新築)하셨고
3) 위토(位土, 田,沓)를 마련하여 묘지기를 두었으며
대대(代代)로 시조 묘(始祖 墓) 관리와 시사를 봉행(奉行)토록 하는 초석(礎石)을 마련하셨습니다.
배위(配位)로는 정부인(貞夫人)으로만 기록되었으며 3남 3녀를 두셨다.
묘소(墓所)는 광주군 돌마면 에 계셨던 것으로 구전(口傳)되어 왔으나 현재로는 정확한 위치를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