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의정공 諱 克均은 다섯 아들이 모두 대과에 급제하여 당상관이 된 것으로 유명한 충희공 諱 李仁孫의 5형제 중 막내 아들이시다.
연산군이 말년에 가장 증오했던 신하 중 한 사람이 당시의 좌의정 이극균이었다. 왕조실록의 연산군 일지에 보면 연산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이극균 같은놈"으로 몰아서 죽이거나 귀양 보냈다는 기록이 여러 번 나온다.
좌의정공은 20세 때인 1456년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무예에도 능하여 성종대에 문무요직을 두루 거쳤는데 1461년 함길도 체찰사로 부임하는 한명회의 종사관으로 임명되어 무관직에 종사하게 된 것을 시작으로 문관이면서도 변방을 지키는 장수로서 오래 동안 봉직하였고 세종 때의 김종서와 함께 문관 출신 덕장으로 그 이름이 높았다.
1467년에는 당시의 골칫거리였던 만포지방의 토적 이만주를 회유하여 굴복시킴으로서 북쪽 변방을 수호하였고 1469년에는 남쪽 지방을 자주 노략질하던 대마도주 종정국을 회유하여 남쪽 변방도 굳게 지키게 되었다.
1501년에는 성준과 함께 서북제번기(西北諸蕃記)와 서북지방 지도를 최초로 편찬하여 북방 경계선 수호에 매우 중요한 기초를 마련하였다.
연산초기에 광남군(廣南君)으로 봉작(封爵)되었고 우의정을 거쳐 바로 좌의정에 제수 되었는데 연산의 방탕한 생활이 그 도를 점점 더해가자 측근에서 왕의 잘못을 가장 신랄하게 비판하여 점점 연산의 미움을 사게되었다.
연산10년 임금이 주는 술잔을 엎질렀다 하여 판중추부사인 조카 이세좌가 귀양가고 그 가까운 일족을 치죄할 때 공이 이를 말리려다가 같이 귀양길에 오르게 되었고 결국은 68세를 일기로 사약을 받아 돌아가셨다. 그는 사약을 마시면서도 "나는 나라를 위하여 일한 공은 있으되 사약을 받을만한 죄를 지은 일이 없으니 형리는 왕에게 이 말을 그대로 전하거라" 고 호통을 쳤다.
이 말을 전해들은 연산은 대노하여 시체를 관에서 꺼내어 갈기갈기 찢고 뼈를 갈아서 바람에 날려보내도록 하였다.
나아가서 좌의정공이 살던 집을 헐어 없애고 그 자리에 연못을 만들어 죄명을 새긴 돌비석을 세우게 하였다.
연산군 일지에 보면 좌의정공은 연산의 모든 행동을 왕의 면전에서 자주 비판하였는데 왕의 체통에 맞지 않는 옷을 입거나 물건을 갖거나 행동을 하는 것을 삼사의 관헌들에게 일일이 논계 하도록 지시하였고, 연산에게는 인심이 멀어져가고 있음을 직언하기도 하였다.
좌의정공이 사약을 받고 죽은 뒤 연산은 어머니 폐비 윤씨의 원수를 갚는다며 많은 신하들과 그 일족들을 죽이고 귀양보냈으니 이것이 곧 갑자사화이다.
세조, 예종, 성종 등 여러 대의 왕조에 걸쳐 공의 형제 및 조카 십여명이 과거에 급제하여 당상관 이상의 높은 벼슬을 하게되니 당시 국내에는 물론 이웃 나라에까지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광주이씨는 "해동제일의 명문가"로 명성을 날렸으나 연산대에 이르러 200여명의 친인척이 죽거나 귀양가는 큰 수난을 겪으면서 그 세가 완전히 꺾이고 말았다.
1506년 중종반정이 성공한 뒤에 조세보(趙世輔)라는 사람이 상소를 올렸는데 이르기를 연산군의 명으로 전국을 돌며 효시되던 공의 머리를 당시의 연안부사가 베 주머니에 싸고 대 광주리에 담아 남 몰래 보관하고 있다고 고하였다.
이 말을 들은 중종은 즉시 이를 거두어 정승의 예를 갖추어 장사지내도록 하였고 후손들이 셋째형님(李克增)묘역이 있는 성남시 야탑동에 모셨었는데 1991년 도시계획으로 이장 하게되어 지금은 남양주군 용정리에 그의 묘가 있다.
공의 5대 종손인 漢蔭 李德馨(한음 이덕형)선생은 선조, 광해 양대에 걸쳐 세 번의 영의정과 최연소 대제학(文衡 (문형))을 지냈으며 임진란 때 명나라 원군을 청해와서 명군의 접반사로 왜란이 끝날 때까지 명군 진영에서 앞장서서 왜적을 물리치신 분으로 유명하다.
정조때의 유명한 성리학자 茯菴 李基讓(복암 이기양)은 공의 12대손이고 고종때의 이조판서 李宜翼(이의익)은 14대 종손이다.
공의 가계는 우리 나라의 명문가 중에서도 순수한 장자 세습으로 오늘날까지 600년 가까이 이어져 오고 있는 몇 안 되는 가문중의 하나로 알려지고 있다.
좌의정공의 장남이시며 여러 기록으로 미루어 1465년경에 나셔서 1500년 전후에 별세하신 것으로 추정된다.
20대 초반에 사재참봉(司宰參奉)에 특채되어 관직을 시작하셨고 바로 무과에 장원급제 하셨는데 중종반정의 공신 박원종과 동방이시다.
형조정랑을 거쳐 영천군수를 지내다가 남양부사로 특채되어 임지를 떠날 때 현지 백성들이 여러 차례 연명으로 상소를 올려 유임을 요청했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선정을 베푸셨다.
문무 양쪽으로 뛰어난 재주가 있어 앞날이 촉망되었는데 안타깝게도 남양부사 재직 중 30대 초반에 돌아가셨다.
별세 직후에 아버님 좌의정공도 공의 사촌 형님 광양군(世佐)의 억울함을 두둔하시다가 연산군의 노여움을 사서 사약을 받고 돌아가셨고 같은 해에 연산군이 일으킨 갑자사화의 여파로 부관참시, 쇄골표풍(시신을 꺼내 가루내어 바람에 날려버림)의 참화를 입으셨다.
진위(지금의 평택)에 유택이 있었으나 1979년 좌의정공 묘소를 이장할 때 공의 묘소도 남양주군 용정리 부친의 옆 자리로 이전하였다.
증 정부인 예안우씨와 2남2년를 두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