字는 仲固이시니 이 분은 觀察使公 諱 禮字孫의 둘째아드님으로 참판공 諱 克字基의 아우님으로 이른바 廣州李氏八克朝廷 당시의 八從兄弟 분들 중 제일 끝집이 되시고 左通禮公派의 派祖이시다.
公께서는 일찍이 父親이 管押使로 중국에서 돌아오시다 鳳山에서 득병하시니 上께서 내의 金有智와 二子 克堅에 命하여 현지에서 치료케 하였으나 치료한 보람 없이 同年三月 十一日 돌아가시자 아버님을 모시고 와 安葬하니 그 효심이 대단했다.
通訓大夫 行 司憲府持平을 거쳐 開城府經歷 軍器寺判官을 거치시어 軍資寺副正 星州牧使와 通禮院 左通禮를 歷任하시었다. 특히 燕山混祖 時 甲子士禍에 從班叔侄 여러분이 慘禍를 당하고 또한 公 역시 家産이 籍沒됨으로 妻家 고장인 全北 沃溝 臨陂 柳村으로내려가 隱居生活을 하시고 그 곳에서 세상을 뜨시니 後에 贈職이 吏曹參議이시며 墓所는 이곳 鷲山里 柳村 鷲城山 壬坐에 모셨다.
沈澮는 公을 평하기를, 사람됨이 勤儉하고 質朴하다 하였으며 또한 洪應도 公을 평하기를, 勤實하게 맡은 바 임무에 忠實한다 하였으니 公 또한 先代로부터 전하여져온 靑白 精神의 所有者이셨다.
配位로는 큰할머니 贈淑夫人 南陽洪氏로 夫君墓 左側에 계시며 작은할머니 贈淑夫人 昌寧成는 夫君墓下에 계신다.
이곳 左通禮公 墓所에 얽힌 逸話로는 公께서 이 곳에 오신지 얼마되지 않아 贈禮曹判書이신 장인 諱 秀番께서 돌아가시니 公의 산소자리를 보고 둘도 없는 명당이라 그 자손이 크게 繁盛하리라는 이야기를 들은 昌寧成氏 할머니께서 밤새 壙中에다 물을 날러 부으니 다음날 장례를 치르려던 喪制들이 이를 보고 大驚失色하여 다른 곳에 墓所를 쓰고 그 곳을 다시 메웠다.
그 후 夫君되시는 左通禮公께서 돌아가시니 이 곳에 夫君을 모시니 그 후 左通禮公 後孫이 오늘과 같이 大成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