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攀(府使公) 字는 士龍, 이 어른이 左通禮公의 長子이시니 筮仕로 長湍府使를 지내시고 中宗29(甲午 1534)年에 卒하시니 贈吏曹參議이다.
墓所는 臨陂柳村 鷲城山 壬坐先瑩下에 있다. 配位로는 初娶 贈淑夫人原州李氏 墓所는 (府君과 쌍탑)이고 再娶 贈淑夫人礪山宋氏, 墓所는 府君墓右便이다.
아드님 英符(正郞公) 한 분이다.
(2) 英 符(正郞公) 字는 應瑞, 燕山己未(1499)에 誕生하시고, 中宗 癸酉(1513)에 生員, 丙子(1516)에 文科亞元, 翰林을 거쳐 吏曹正郞으로 계실때 己卯士禍(1519)가 일어나자, 趙靜庵을 爲始한 士林을 救하려다 저들 勳舊派에 依하여 持平으로 左遷되어 곧이어 削 奪官職되어 臨陂로 내려와 癸末(1523)에 享年 25歲로 死하시니, 廣李一門九賢 중의 한 분으로 己卯明賢으로 꼽히며 己卯錄에 詳載되어 있다.
後에 贈職 吏曹參判이 되었다가, 다시 追贈, 右議政이 내려졌고, 墓所는 臨陂, 鷲城山 (左通禮公位左便) 壬坐이며, 옛날 神道碑가 있었으나 歲月이 오래되어 알아볼 수 없게 되어 近年에 神道碑의 改竪와 床席,石物등을 改置하였다.
配位 贈貞敬夫人 龍仁李氏이며 묘부이다.
公께서는 뛰어난 學文과 正義를 爲해 屈치 않는 精神으로 그 짧은 生涯를 마쳤으나, 아드님 三兄弟분을 두셨으니, 長子 首慶, 二子 重慶, 三子 復慶 세분이시다.
① 首慶後孫은 忠南燕岐, 鳥致院, 舒川等地에 世居하고
② 重慶後孫은塘南에 世居
③ 復慶後孫은 楊州廣岩里一帶에 世居하고 있다.
(3) 首慶(校理公) 字는 伯善, 號六有堂, 中宗丙子(1516)에 誕生하시고, 丁酉(1537)에 司馬試를 거쳐 戊戌(1538)에 文科 及第하시고, 翰林, 春坊을 거쳐 弘文館校理를 歷任하시고, 明宗丙年(1546)에 削奪官職되어 穩城謫所로 가셨다가 辛亥(1551)에 竹山으로 옮겨지고,癸丑(1553)에 田里로 풀여 오신뒤 壬戊(1562)에 卒하시니 享年 47歲이었다.
丙寅 (1566)에 職牒이 追還되였으며, 墓所는 臨陂卯木山江亭里 乙坐에 있고, 弟吏曹參判 重慶이 撰碣銘하였다.
配位 貞夫人 順天金氏이며 묘부이고 父는 參判, 希悅.
(4) 重慶(參判公) 字는 叔喜, 中宗丁丑(1517)에 誕生하시고, 癸卯에 司馬試를 거쳐 明宗 丙午(1546)에 文科 及第하시고 翰林, 玉堂, 銓郞, 檢詳, 舍人, 三司長官을 歷任하시고 吏曹參判에 오르셨으며, 淸白吏로 被選되시고, 丁卯(1567)에 享年 51歲로 卒하시었다.
墓所는 驪州大神面塘南里癸坐이시고, 配位는 初娶가 貞夫人 茂松尹氏이고 再娶 貞夫人 坡平尹氏이다.
(5) 復慶(司僕寺正公) 筮仕別坐, 贈職司僕寺正이시다. 墓所는 楊州郡別內面廣岩乾坐이다.
이 어른에 對해서도 生卒年代가 譜錄上에 없으니 민망할 뿐이다.
配位는 贈貞夫人 高麗申氏이며 墓所는 府君과 雙墳이다. 아드님은 系子 懲 (首慶 第4子)이시다.
(6) 懲(承旨公) 生父 首慶, 字正而, 中宗丙辰(1556)에 生하시고 丙子(1576)에 進士, 丁丑(1577)에 卒하시니, 享年 22歲로 夭壽하셨다. 贈職 左承旨, 墓所는 先考墓右崗에 있고, 配位는 淑父人 豊山柳氏이며 墓所는 雙墳이고, 父大司憲이다.
(7) 亭胤 (副護軍公) 生父心海(承仕郞公派進慶子) 字震伯, 宣朝癸酉(1573)生, 筮仕로 察訪이 되시고 振武原從勳으로 嘉善大夫에 오르시고, 副護軍을 歷任하시고 丁酉(1657)에 享年 85歲로 卒하시니 贈職이 戶曹參判이시며 墓所는 先考墓石, 亥坐이다.
配位는 初娶贈貞夫人 南陽洪氏이며 墓所는 先考墓石便이고 父直提學, 再娶贈貞夫人 全州李氏이며 墓所 府君墓와 雙墳이다.
(8) 道 彬 (統制使公) 字는 都哉 仁祖丁卯(1627) 11月 26日生이시고 戊子(1648)에 武科에 及第하여 孝宗朝때 李完, 具仁와 더불어 같이 專才로 選拔되여 世稱3武臣이라 하였다.
通政大夫로서 寧邊에 가시고 嘉善大夫로 올라 平安道兵使로 가시고 다시 統制使로 올라 있다가 顯宗 庚戌(1670) 8月 15日에 卒하시니 享年 44歲이시다.
後에 아드님 宇恒 貴로 因하여 兵曹判書에 贈職되시고 墓所는 廣田里 壽板案이다. 配貞夫人 全州李氏이시며 父宗室蓬昌守炯儼이고 묘부이다.
(9) 宇 恒 (景武公) 字는 汝久, 仁祖戊子(1648) 8月 11日 子時에 生하시고 肅宗丙辰 (1676) 武科에 올라 熙川, 漆谷營將, 通津, 寧邊, 江界, 水原, 濟州, 全羅水使 및 兵使를 歷任하시고, 京畿水使, 辛巳 11月 19日에 總戒使, 平安道兵使, 統制使, 甲午(1714) 7月에 다시 總戒使, 漢城左 . 右尹에 이르시고, 丁酉(1717)에 嘉善大夫에 오르시고, 己亥 (1719)에 資憲大夫 같은 해에 肅宗 耆社에 드시고 다시 正憲大夫, 知中樞에 오르시다.
景宗壬寅(1722)에 큰 誣獄이 이러나 公께서는 5月 20日 獄中에서 卒하셨고 正宗乙巳(1785)에 伸雪復官되고 政祭와 左贊成에 贈職되었다.
그런데 이것이 正祖丁未(1787)에 反案追奪되었다가 辛酉(1801)에 伸雪復官되고 純祖壬辰(1882)에 景武로 諡號가 내려지고, 顯宗 甲辰(1844)에 致祭가 내려지고 高宗乙丑 (1865)에 세사부조의 命이 내려졌고, 이 후에도 두 차례나 致祭가 내려졌다.
墓所는 先考墓下 酉坐이고, 配位로는 初娶 貞敬夫人 鎭川宋氏이며 묘부이고, 再娶 貞敬夫人 普州姜氏이며 묘부이시다.
(1) 摯(承任郞公) 字는 士任 이 어른이 入漆谷始祖이신데 漆谷에 오신 綠由는 先府君 左通禮公께서 星州牧使로 오실 때 冊房道令님으로 따라 오셨는데 通禮公께서 星州고을에 隣接한 漆谷에 崔河氏란 사람이 家法이 있게 산다는 말을 듣고 그 따님 과 婚事를 치루게 되었고, 崔氏家는 無男獨女로서 그 집에 사위가 와서 살기를 請하므로 通禮公께서도 承諾하시고 還京時에 그대로 오심으로서 承任郞께서는 그대로 崔氏家 産을 이어받아 定着하신 것이다.
이 어른의 生年月日은 未詳이고, 中宗乙未(1535) 8月 3日에 卒하시고 墓所는 枝川面 主蜂艮坐이며, 配位는 永川崔氏 墓所는 上下墳이며, 有表石, 玄孫 參判潤雨 撰陰記하시고 誌石을 묻었다.
(2) 潤 雨 (石潭先生) 字는 茂佰, 宣祖己巳(1569) 11月 4日 子時에 生하시고, 鄭寒岡에 게 師事하여 高第가 되시고, 張旅軒, 鄭愚伏과 道義交하셨으며, 辛卯(1591)에 進士, 丙 午(1606)에 文科에 及第하셨다.
光海朝때 藝文館待敎 奉敎翰林을 거치시고 史筆直書한 일로 群凶輩에 排斥當해 鏡城 判官으로 나가셨을 때는 興學善政하여 百姓들이 鐵碑를 세워 讚揚하였고, 儒林들은 興學碑를 세웠다.
以後 光海混政의 繼續으로 不仕하고 泗上(枝川面)에서 講學에만 힘쓰시든 中, 仁祖反 政이 되자 제일 먼저 召命을 받으시고 다시 入朝하여 玉堂東壁, 檢詳, 舍人, 輔德을 거쳐 工曹參判, 知製敎에 이르시고 甲戌(1634) 閏 8月 9日 享年 66세로 卒하시니 靖社原 從勳으로 贈史曹參判이 내려졌다.
儒林에서는 星州檜淵書院과 漆谷泗陽書院(鄭寒岡先生書院)에 獨配亭하였고, 會寧에서는 鰲山書院을 세워 奉亭하였으며, 家廟에서는 不遷位로 奉祀하고 있다.
文集, 實紀年譜가 刊行되었고, 墓所는 陶唐洞 曾祖考墓下子坐이며 허미수先生의 撰碣 銘과 金東溟世濂의 撰誌文이 있다. 配位는 贈貞夫人 仁川蔡氏이며, 墓所는 枝川面資元 村 僉正公墓下甲坐이다.
아드님 ①長子道昌(寒竹亭) ②次子道長(洛村) ③三子道章(鑑湖堂) 세 분이시다.
(3) 道 長 (洛村) 字는 泰始 號는 洛村, 宣祖祭卯 5月 12日 寅時에 石潭先生 2子로 生하시고 從叔父에게 入後하였으며 鄭寒岡, 張旅軒으로부터 師事받고 仁祖庚午(1630)에 文科及第, 待敎, 奉敎, 翰林, 銓郞을 歷任하시고 副應敎, 知製敎에 이르셨다.
丙子胡亂(1636) 當時 仁祖 南漢山城으로 急幸할 때, 公께서 御駕를 모시고 中路에서 罔措함을 막으며 겨우 山城으로 들어가 注書로서 國務叢雜하고 허기지고 몸이 어는대도 文書를 記錄하시는데 筆翰이 如流(글씨와 文章이 물흐르는듯함)하시니 滿朝가 嘆善하였고 博學通敏하시고 論事에 밝으시니 世稱國器라 하였다.
仁祖께서도 特히 寵愛하여 病暇疏를 올리면 御醫를 보내오고 御藥을 下賜함이 여러차례였다.
甲申(1644) 11月 18日 享年 42歲로 卒하시니 朝野가 哀惜하였으며 左贊成 兩館大提學 으로 贈職되었다.
文集 1卷이 刊行되었으며 墓所는 高靈茶山面池洞乾坐이고 허미수先生이 墓碣銘을 撰하였다.
配位는 贈貞敬夫人 安東金氏이시며, 父判中樞時讓이고 墓는 上下墳이다.
(4) 元 禎(文翼公) 字는 士徵 號歸岩, 光海壬戌(1622) 8月 11日 丑時에 生하시고 仁祖 戊子(1648)에 生員, 孝宗壬辰(1652)에 文科亞元, 翰林, 待敎, 奉敎, 文學, 持平을 거쳐 都承旨 4번, 大司成 7번, 大司憲 4번, 工,刑,兵,禮, 戶曹參判, 工,刑,戶,吏曹判書兼 判義禁府事, 知經筵, 春秋館, 成均館提學을 歷任하셨다.
일찍이 全州判尹으로 계실 때에 5.6가지 일을 一時에 處決하심에 左酬右應으로 通暢 如流하시니 보는 사람들이 神人이라 하였다. 聰明絶倫하고 文章浩汗하며 德望氣量이 一世에 으뜸가니 縉紳의 領首가 되시고 義理之事에 當하여서는 壁과 같아서 굽히지 않으셨으니 權奸輩들의 猜忌가 많았으니 마침내 肅宗庚申(1680)에 凶黨들이 일으킨 誣獄士禍(庚申士禍, 庚申黜陟)에 몰려들어 同年 8月 21日 慘禍를 當하셨으니 享年 59歲이었다.
己巳(1689)에 肅宗은 公의 寃死함을 깨닫고 特命으로 復官 . 賜祭하고 領議政으로 贈職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甲戌(1694)에 追奪되었다가 다시 肅宗壬辰(1712)에 復官 . 贈職 . 賜祭가 내려졌으며 高宗辛未(1871)에文翼公으로 諡號가 내려졌다. 石田 文翼公宗 家에 부조위 사당으로 모시고 있으며 公이 記述한 完府決訟錄 1卷과 京山誌(星州邑誌) 2卷은 文化財로 指定되고 歸岩集 6卷이 刊行되었고 墓所는 永川大昌面新光洞(합쌍동) 丁坐이고 蔡攀岩濟恭相國이 神道碑銘을 撰했으며 神道碑는 石田 마을 앞에 세워졌었는데 지금은 景岩齎境內에 移建되어 있다. 配位는 貞敬夫人 碧珍李氏이시며 父承旨彦英이고 묘부이다.
(5) 元 祿(都憲公) 字는 士與 號는 朴谷, 仁祖 己巳(1629) 2月 24日寅時生이시고, 文翼 公의 長弟로서 허미수先生에게 師事하였으며 孝宗辛卯(1651)에 生員試에 壯元, 顯宗 癸卯(1663)에 洗馬로서 文科에 及第하시고, 典籍 .刑曹.
兵曹正郞을 거쳐 義州府尹, 戶曹, 兵曹參議, 左右承旨, 禮曹 . 戶曹參判 漢城右尹을 歷任하시고, 嘉善大夫 司憲府 大司憲에까지 오르시니, 이 사이에 承旨 9차례와 大司憲을 5차례나 歷任하셨다.
庚申士禍後에는 洛江一丘에 數間屋子를 마련하시고 老後之計를 세우시며 一本四幹技松을 심어 四松軒이라 扁額하시고, 里名을 따서 朴谷이라 自號하시며 老年을 지내시다가, 肅宗戊辰(1688) 12月 21日에 卒하시니 享年 60歲이였다. 己巳換局(1689)後에 特命賜祭가 내려졌고, 梅院朴谷宗家에서 부조위사당으로 모시고 있으며, 遺稿2卷이 刊行되였고, 墓所는 宜寧洛西面 杜谷乾坐이며, 從5代孫萬運 호묵헌 公이 墓碣銘을 撰하셨다.
配位는 初娶貞夫人 光州李氏이며, 墓所는 高靈茶山面池洞先瑩下乾坐이고 再娶貞夫人 順興安氏이며 考位묘부이다.
(6) 聃命(靜齊公) 字는 耳老, 號는 靜齊, 仁祖(1946) 7月23日 文翼公의 長子로 誕生하시고, 顯宗 丙年(1667)에 生員試에 1等, 庚戌(1970)에 文科亞元으로 及第하시고, 肅宗乙卯(1675)에 弘文館 實錄郞廳에 選拔되시고, 玉堂東壁, 吏曹佐郞 ㆍ 正郞를 거쳐 檢詳, 舍人, 左ㆍ右承旨, 都承旨를 歷任하시고, 三司長官 富提學 ㆍ工曹, 禮曹, 吏曹參判에 오르셨다.
庚午年(1690)에 嶺南一帶 71州가 大荒(凶年)에 빠지자, 朝廷大臣들은 公이 아니고서는 難局을 맡을 適任者가 없다고 薦擧함에 따라 公께서 嶺南 觀察使가 되신 다음 列 邑의 被害狀을 巡視하시고, 名道의 倉穀 30餘萬石을 移動運搬하는 한편 수십만 道民에 대한 老少壯幼와 程度에 따른 差等을 매겨 빠짐없이 골고루 賑施하여 餓死病死者가 한 사람도 없었다.
公께서는 數月사이에 모발이 다 희여졌고, 國朝以來로 大賑政이였으니 道民들은 頌德하여 永世不志碑를 세웠다.
(이 碑는 近年에 왜관공원산에 移建되어 있음)
公께서는 庚申年以來 피묻은 옷을 10年동안 입고, 臥薪嘗膽 설원하기를 期圖하던 中 己巳年(1689)에 이르러 刑曹參議로 부르심을 받고, 肅宗에게 拜謁하였고, 肅宗은 크게 慰 勞하였으며, 마침내 庚申士禍의 主謀者들에 對해 복수하고 설원하였다. 公께서 朝庭에 出入하실 때는 머리한번 숙일 때와 발 한번 옮겨 놓을 때도 警戒하였고, 6年間에 朝庭에 머무른 날은 不過 몇일에 지나지 않으셨으니, 當時의 政治社會가 얼마나 무서운 판국이 였는가를 넉넉히 짐작할 수 있다. 肅宗辛巳 1701) 正月 16日에 卒하시니 享年 56歲이시고, 墓所는 高靈池洞 祖考墓下 酉坐이며, 文集4卷이 刊行되고, 寄軒姜楷가 行狀을 撰하고, 定齊柳致明이 墓碣銘을 撰하였다.
配位는 貞夫人 全州李氏이시며 父佐郞贈吏曹參判碩揆이고, 묘부이다.
(7) 漢命(校理公) 字는 南紀 號는 洛涯 靜齊公의 長弟로서 孝宗辛卯(1651) 12月29日 辰時生이시며, 顯宗丙午(1666)에 生員, 肅宗乙卯(1675)에 文科及第하시고 待敎ㆍ奉敎ㆍ翰林를 거쳐 關西繡衣御使 弘文館校理를 歷任하시다.
丁卯(1687) 6月 23日 卒하시니 享年 37歲로 夭壽하셨다. 贈職 副應敎이고, 遺文1卷, 墓所는 星州 龍岩面上彦洞 午坐, 伯氏靜齊公이 墓誌를 撰하였다. 配位는 淑夫人 全州李氏이며 文宗屋平 雲君이고 墓이다.
(1)擥 이 어른은 左通禮公 셋째아드님이시고, 長瑞府使公의 季氏이시다 贈吏曹參判이신데 生ㆍ卒年代 및 墓所 配位까지도 未詳이니 참으로 민망한 일이고,
(2) 英賢 이 어른은 위 參判公의 아드님으로서 中宗丁卯(1507)生이시고, 乙酉(1525)에 司馬試, 丁酉(1537)에 文科及第 戊戌(1538)에 擢英試(英才拔擢)에 及第하시고 翰林南狀, 銓郞을 거쳐 直提學, 吏曹參議, 忠淸道觀察使, 開城留守, 禮曹參判까지 歷任하셨다.
宣祖壬申(1572)에 卒하시니 享年66歲이시고 配位만은 貞夫人 平山申氏로 曾祖父觀察 使公(諱禮孫) 墓옆에 있으며, 墓表에도 記錄되어 있다. 그리고 이 어른의 後孫은 現在로 는 아주 微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