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의 휘는 극자돈(克字墩) 이시고 자(字)는사고(士高)이시며 자호(自號)는 사봉(四峰)이시니 조선국(朝鮮國) 세종(世宗) 十七년(年) <1435年> 부친(父親) 충희공(忠僖公) 이신 휘(諱) 인자손(仁字孫)과 모친(母親) 교하노씨(交河盧氏) 사이에 오남삼녀(五男三女) 중 넷째 아드님으로 태어나시니 첫째 형님은 광능부원군(廣陵府院君)이신 시(諡) 익평공(翼平公) 휘(諱) 극자배(克字培) 이시고 두째형님이신 광성군(廣城君) 시(諡) 문경공(文景公) 휘(諱) 극자감(克字堪)이시며 세째형님이신 광천부원군(廣川府院君)의 시(諡)는 공장공(恭長公) 휘(諱)는 극자증(克字)이시다.
제씨(弟氏)이신 광남군(廣南君) 시(諡) 충민공(忠愍公) 휘(諱) 극자균(克字均)이시다.
선조(先祖)께서는 세조3년(世祖三年) <1457년> 시년문과(試年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전농시(典農寺) 주부(主簿)로 보임(補任) 되신 후 문학(文學)에 선임(選任)되셨다.
통례문(通禮門) 판관(判官) 성균관(成均館) 직강(直講)을 거쳐 세조13년(世祖十三年)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를 하시면서 세조(世祖)를 온양(溫陽)에 호종(扈從)하면서 총신(寵臣)이었던 홍윤성(洪允成)을 탄핵(彈劾)하시고 세조14년(世祖十四年) 중시(重試)에서 아원(亞元)을 하시고 일본국(日本國) 통신사(通信使)가 되셨으며 예조참의(禮曹參議)를 하시었다. 세조의 명을 받아 둘째형님과 셋째형님과 같이 능엄경을 역주하시었다.
또한 세조실록(世祖實錄) 찬술(撰術)에 참여하시었고 치세(治世)에는 능신(能臣)이요 난세(亂世)에는 간웅(姦雄)이란 책시(策試)를 보니 장원(壯元)을 하시고 또한 예종(睿宗) 즉위(卽位)년 고시관(考試官)으로 시년문과(試年文科)에 참여 하시었다. 계감(繼鑑)인 무정보감(武定寶鑑)을 찬술(撰術)하시었다. 수(守)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이 되셔서는 세조(世祖)가 계유정난(癸酉政亂) 후 합권(合權)시켰던 이조(吏曹)와 병조(兵曹)를 분리(分離)시키셨다. 또한 시무십이조(時務十二條)를 상소(上疏)하시어 사서인(士庶人) 교육(敎育)에 지대(至大)한 공을 세우셨다. 성종(成宗)의 생부(生父)를 의경왕(懿敬王)으로 모시는 예의사(禮義使)로도 참여 하시었고 이어서 형조참판(刑曹參判)을 하시고 성종2년(成宗二年)에 참좌리공신(參左理功臣)하시여 광원군(廣原君)에 봉군(封君)되셨다.
강원도(江原道) 관찰사(觀察使) 호조참판(戶曹參判)후 성절사(聖節使)로 명(明)에 다녀오신 후 예조참판(禮曹參判)을 하시었다.
성종8년(成宗八年) 주문사(奏聞使)로 왕비한씨(王妃韓氏)가 죽고 후사(後嗣)가 없어 윤씨(尹氏)를 계비(繼妃)로 삼게 할 것을 주청(奏請)하고 돌아오셔서 예조참판 (禮曹參判)으로 선잠제(先蠶祭)의 악장(樂章)을 만드시고 할머니 안동권씨(安東權氏)와 함께 친잠행사(親蠶行事)를 주관 하시었다.
사십오세(四十五歲)에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를 하신 후 영안도관찰사(永安道觀察使)를 하시니 많은 업적이 있으셨다.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에 다시 오르신 후 강목신증(綱目新增)을 찬술(撰述)하시었고 또 다시 정조사(正朝使)로 표(表), 전(箋)을 받들고 경사(京師)에 다녀 오셨다. 평안(平安), 전라(全羅), 진휼사(賑恤使)로 다녀 오셨으며 다시 명사(明使) 선위사(宣慰使)로 자헌대부(資憲大夫) 한 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겸하셨다.
평안도(平安道) 관찰사(觀察使)를 지내신 후 다시 병조판서(兵曹判書)로 북벌계획(北伐計劃)에 큰형님이신 이극배(李克培)를 위시하여 윤필상(尹弼商) 허종(許琮) 이계동(李季仝)등 제현과 함께 참여 하였으나 사전(事前)에 이 일이 널리 유포(流布)되어 실행하지 못하였다.
호조판서(戶曹判書)를 하신 후 숭정대부(崇政大夫) 행(行) 경상도(慶尙道) 관찰사(觀察使)로 재임(在任) 하시면서 많은 서책(書冊)을 발간하셨다. 이조판서(吏曹判書)로 계시면서 대명률(大明律)과 율조소의(律條疏議) 대관의두(對款議頭) 사죄속법(私罪贖法)을 논하셨다. 성종(成宗)의 죽음으로 빈전도감제조(嬪殿都監提調) 산릉간심사(山陵看審査)를 겸하셨다. 의정부(議政府) 우찬성(右贊成)으로 명사(明使) 관반(館伴)을 겸(兼)하고 성종실록(成宗實錄) 편찬(編纂)에 참여 하시었다.
숭록대부(崇祿大夫)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 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를 겸하시고 영경연사(領經筵司)로써 대전(大典)의 휼수조(恤囚條)를 논(論)하시고 경연(經筵)에서 '한광무기(漢光武紀) 상제기의 박사십사가(博士十四家)를 세우다' 를 강(講)하시며 왕에게 많은 간언(諫言)을 하셨다. 또한 수 차례 상소(上疏)를 올리어 왕이 바른 정사(政事)를 할 것을 극간(極諫)하시었다. 사치금지(奢侈禁止) 이십삼조(二十三條) 차자문(箚子文)을 올리시고 호적식년(戶籍式年) 개정(改定)에 참여 하셨다.
윤필상(尹弼商) 노사신(盧思愼) 한치형(韓致亨) 유자광(柳子光)이 일으킨 무오사화(戊午史禍)에 실록청(實錄廳) 도청(都廳)으로써 즉시 아뢰지 않은 죄(罪)로 관직에서 물러나시었다가 동년 십이월 충훈부(忠勳府) 광원군(廣原君)으로 복권되셨다가 상정청(詳定廳) 감사(監司) 겸(兼) 병조판서(兵曹判書) 관상감사(觀象監事)로 재직 중 또다시 중국사신(中國使臣)의 관반(館伴)을 삼으시니 연산(燕山) 九年 二月의 일이다.
公께서는 수차(數次)에 걸치어 사직(辭職)의 소(疏)를 올리니 관반(館伴)의 직책(職責) 만은 공(公)이 아니면 안된다 하여 관반(館伴)의 임무(任務)를 수행(修行)하시던 중 二月二十八日 서거(逝去)하시니 향년(享年) 六十九세(歲)이시다. 이에 나라에서는 월헌(月軒) 정수강(丁壽岡)에 제문(祭文)을 짓게 하고 파평부원군(坡平府院君) 윤필상(尹弼商)과 의정부(議政府) 좌참찬(左參贊) 윤효손(尹孝孫)등으로 하여금 치제(致祭)하게 하였다.
시호(諡號)는 익평(翼平) [사려심원(思慮深遠)을 익(翼)이라하고 집사유제(執事有制)를 평(平)]이시고 명종(明宗) 十四年에 세사부조지전을 받으셨으며 묘소는 성남(城南) 하대원(下大院)에 계신다.
배위(配位)는 정경부인(貞敬夫人) 안동권씨(安東權氏)로 예조참판(禮曹參判) 지(至)의 따님으로 향수(享壽) 九十二歲이시다
世子 또한 理解하기 어려울 것이니 卿은 이 뜻을 잘 알아서 世子가 大學을 다 理解한 後에 다음 論語를 읽도록 함이 옳은 줄 안다 하며 御 製訓辭 十章을 내리시고 公이 그 끝에다 跋文을 지으시니 創業之主는 大功德이 있지 아니하면 하늘이 大命을 부여하지 아니하고 嗣業者는 先訓을 떨어뜨리지 아니하여야 하늘이 반드시 보호하고 사람이 반드시 愛戴할 것이니 이렇게 되면 큰 德이 거듭 빛이 나서 크게 繼承하고 크게 현저 할 것입니다.
殿下는 文敎를 崇尙하고 武備를 갖추고 飮食과 衣服까지도 素朴하게 하시고 또 官室도 好奢코저 아니하며 先王의 規訓을 조금도 어긋난데 없이 삼가히 지키시면서 慊慊히 百姓 한 사람이라도 그 살바를 얻지 못할까 念慮하시고 또 世子께서는 역시 英特하고 夙成하여 外人의 輔導를 期待할 것이 없으며 殿下는 臣의 옹졸하고 고루하며 아는것 조차 없는 것을 탓하지 아니하고 侍講을 命하고 또 어느 날 御製訓辭 十章을 世子에게 내리시며 臣에게 跋文을 命하기로 받아 三, 四번을 伏讀하니 글은 簡略하고 뜻은 멀고 커서 修齊治平의 道가 다 갖추었으니 참으로 聖子神孫의 千萬世 까지도 大訓이 될것이며 우리 世子의 英明한 바탕으로 이 訓辭를 입고 닦아 輕忽하지 아니하면 이른바 큰 德이 거듭 빛이 나고 크게 顯著하여 크게 繼承하는데 足히 말할 것이 없으리라 하였다.
五月에 都承旨 副提學에 昇進하고 八月에 上이 交泰殿에서 公을 引見하고 邊事를 論議할 때에 上이 口號를 公에게 받아 쓰게 하여 宗親과 諸宰에게 보이도록 하여 가로되 衣食이 足하여 無盡한 福을 누리고저 하는 것은 天子로부터 庶人RK 지 다 一致되는 것이다. 詩에 이르기를 [不素餐兮하니 各各 스스로 경계할 것이로다] 하였다. 公이 그 자리에서 詩를 지어 올리되 臣의 才識이 劣等하여 功列를 贊揚할 수 없고 조그만한 여와석이 어찌 靑天의 缺陷에 보탬이 될까 하였다.
일찍이 조선국초(朝鮮國初)에 오극(五克)이라 일컫는 명문(名門)이 있으니 왕조실록(王朝實錄)에 세조(世祖)5년 7월 16일자 기록을 보면 예조에서 왕에게 아뢰기를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이인손(李仁孫)의 다섯 아들이 모두 과거(科擧)에 등제하였으니 내려주신 전교(傳敎)에 의하여 매년 세사미 이십석을 내려 주었으면 합니다. 왕이 윤허를 하니 후일 다섯 아들 모두 재상(宰相)의 반열에 나아가 공신의 군호(君號)를 받으니 집안의 번성함은 비교할 곳이 없었다.
공은 그 중 넷째 아드님이니 휘(諱)는 극돈(克墩)이요 자(字)는 사고(士高)요 호(號)는 사봉(四峰)이며 성은 李氏요 廣州인 이시다.
증조(曾祖)의 휘는 집(集)이요 자는 호연(浩然)이고 호는 둔촌(遁村)이니 고려국 충목왕조에 문과에 급제하니 학문과 절개가 일세에 빛을 발하니 삼은(三隱)과 도의(道義)로 교유(交遊)하고 오촌(五村) 팔청(八淸) 구일(九逸)등 명현(名賢)들과 학문으로 교유하시었다.
관직(官職)은 봉순대부(奉順大夫)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에 이르렀으나 고려말 정치가 문란하여지자 관직을 은퇴(隱退)하시고 두문자청(杜門自淸)하시였다. 조선조(朝鮮朝)에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에 증직(贈職)되시었다. 조부(祖父)의 휘는 지직(之直)이요 벼슬이 형조우참의(刑曹右參議) 보문각(普門閣)직제학(直提學)에 이르렀으니 맑은 덕행으로 일세에 이름을 날리시니 학자의 표본이되고 조선 국 초에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시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시니 학자들은 탄천선생(炭川先生)이라 일컬었다. 아버님은 휘가 인손이고 자는 중윤(仲胤)이며 호는 풍애(楓厓)이시다. 태종조(太宗朝) 문과에 등제하니 벼슬이 쌓이시어 의정부 우의정(右議政)에 이르니 시호는 충희(忠僖)이시고 영의정(領議政)에 증직(贈職)되시었다. 공은 침착(沈着) 정직(正直)하시고 강개(慷慨)하셨으며 커다란 지략(智略)과 너그럽고 넓은 도량을 가지고 계셨다. 어머님 정경부인(貞敬夫人) 교하노씨(交河盧氏)는 별장(別將) 신의 따님이시니 공을 진심으로 받들어 모시어 집안일을 편안하게 하여 부모님을 정성껏 받들어 모시니 일찍이 효경(孝經) 소학(小學)등 제서를 익히고 자녀교육(子女敎育)에 힘쓰셨다. 공은 17년 을묘에 한양 향교동 본가에서 탄생(誕生)하시니 어려서부터 외모가 웅대하고 행동에 절도가 있으시었다.
세조 3년 정축에 文科에 登第하시니 향수 23세 이시다. 전농주부(典農主簿)겸 문학에 선임되고 승문원(承文院) 正子, 博士에 이르니 학문이 높고 깊으셨으며 언어가 세련되시고 민첩(敏捷)하여 공을 따를 자 아무도 없었다.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 사헌부 집의(執義)에 이르러 흥모가 왕을 속이고 권력을 남용함이 모든 법이나 도리에 어긋남으로 이를 탄핵하니 왕이 놀라 내 일찍이 대간(大諫)이 있음을 말로만 듣고 알았으나 오늘에서야 경을 보고 알았다고 하고 공을 두려워 하였다. 吏, 兵, 禮曹참의(參議)를 거치신 후 왕이 공을 보고 말하기를 卿의 五兄弟는 모두 쓸만한 人才로 협력하여 나를 보필하니 매우 기쁘다. 경의 아버지 인손은 참으로 단아(端雅)한 선비였으나 지금은 죽고 없으니 몹시 애석하다 하고 술을 올리게 하였다.
세조 14년 2월 乙巳에 나라를 다스림에 있어 널리 인재를 구하여 등용하고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 자비롭게 하고 軍을 평소 양성하여 국방에 대비하고 국가의 근본을 道와 禮에 둠을 論한다는 重試에 있어 應試者 예종(睿宗)원년 왕명으로 세조실록과 무정보감을 편찬하시고 6월 丁巳에 치세에는 능신이요 난세에는 간웅이란 제목으로 책시를 보니 장원을 하시고 漢城府右尹으로 나아가고 동월 癸亥 좌윤으로 승차하고 同年 10월 戊辰에 司憲府 大司憲이 되어서 속대전(續大典)을 교정(矯正)하시었다. 성종(成宗) 즉위년 12월 辛未에 世祖가 政權을 잡을 때 吏, 兵權을 겸하여 수양대군이 합권을 시킨 것을 이는 국가의 大權임으로 당연이 분리해야 함을 주장하여 允許를 받으시었다. 성종의 생부 의경세자를 懿敬王으로 추증함에 이를 예의사로 받들어 모시었고 수세(收稅)는 백성을 편하게 하는 것이 제일이며 그 옳은 方法을 얻으면 백성을 편하게 할 수 있으므로 담험 손실을 할 때 그 간교한 속임수가 심하였기에 부득이 공법으로 정한 것이므로 고원분제로 년분하게 되면 담험손실과 다름이 없고 그 土地의 품질을 나눔을 정교하게 할 수 없음을 진언하여 윤허를 받으시고 원년 2월 辛未 상소문을 올려 時宜 12조를 올리니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전하께서는 반드시 제왕학을 닦아야 하며 학교 교육은 孝와 悌부터 먼저 가르치고 文學은 나중에 하며 志節을 높이고 詞華는 소외시켜야 한다.
벼슬과 賞을 주는 制度는 요행을 바라는 풍조를 없애야 하며 지극히 공정하고 바른 길을 보여 주어야 한다. 禮와 廉恥는 국가 倫理의 네 기둥 인 바 高麗 忠臣 三隱과 淸白 강개(慷慨)한 자의 자손도 찾아내어 보고 하도록 해서 포상하고 또 기록해서 절의(節義)의 풍조를 장려해야 한다. 수령은 좋은 사람들을 얻어 任命하면 한 고을 백성이 利益을 얻게 된다. 어질고 청렴해서 구슬아치와 백성이 생업에 편안하게 종사할 수 있도록 한 자는 좋은 벼슬자리로 승진시켜 나머지 사람들을 격려하고 外職을 가벼이 여기는 폐단도 고쳐야 한다. 절도사, 처치사, 만호등 변경 요해처의 장수 중 맡은 직무에 충실한 자는 계급을 뛰어 넘어서라도 등용하고 탐욕스럽게 법을 어기는 자는 천거한 자에까지 罪를 주어 권선징악(勸善懲惡)을 분명히 하고 邊方방어를 굳게 해야 한다.
定員 過多의 被害. 京畿地方의 부역을 감(減)해줄 것. 소군을 소생시키고 영(營) 진(陣)을 충실히 할 것. 우역(郵驛)의 폐해를 改革할 것. 항공(恒貢)을 영원히 폐지할 것. 國家 紀綱을 確立할 것 등이다.
상소문이 들어가자 임금께서 크게 칭찬하고서 院相 등으로 하여금 실천 방안 등을 의논해서 올리도록 하였다. 成宗 2년 3월 참좌리공신 광원군으로 봉해졌으며 刑, 戶, 禮, 兵, 吏 5曹參判을 역임하고 외직으로 江原, 永安, 平安, 全羅 등 4道 觀察使를 역임하니 왕이 말하길 "이제 보니 卿이 협호를 찾아내어 군오에 편입시켜 강자와 약자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로 하여금 모두 처소를 얻게 하고 軍額을 넉넉히 하고 부역이 고르게 되어서 여러 해 동안 답습하여 오던 폐단을 하루 아침에 제거하니 내가 심히 가상히 여긴다" 라고 많은 찬사를 하시었다. 12년 10월 갑진 사헌부 대사헌에 재배(再拜)되었으며 성절사(聖節使) 주청사(奏請使) 정조사(正朝使)의 명을 받아 3차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平安, 全羅, 慶尙 3도의 진휼사(賑恤使)로 나아가니 사관이 말하기를 "왕의 명에 이극돈은 그 임무에 근실하였다" 라고 하였다.
16년 6월 戊子 동국통감을 편찬함에 실록당상이 되어 徐居正, 盧思愼 등과 통감감목을 신증하고 무경등 여러 서적을 책정 하였으며 서문도 지었다. 17년 11월 壬子에는 먹는 것으로 백성이 하늘을 삼는다란 論題로 책시를 지어 장원을 하니 왕은 매우 칭찬하며 아름다운 작품이라고 기뻐하였다.
漢城府尹겸 特進官을 제수 받았다. 선위사때 명나라 사신 예부낭중 기순이 왕을 알현하는 자리에서 선위재상은 예를 함에 있어 단 한가지의 실수도 없으니 진실로 예를 아는 재상이라고 말하니 왕이 매우 기뻐하였다. 21년 4월 丙辰 병조판서에서 의정부 좌참찬 되시고 이어서 22년 6월 癸亥 호조판서를 거쳐 23년 1월 甲午 초승 숭정대부, 행경상도 관찰사로 근무하면서 당송시화(唐宋詩話) 유양잡조(酉陽雜俎) 유산악부(遺山樂府) 파한집(破閑集) 보한집(補閑集) 설원신서(設苑新序)등 제서간행을 하시었다. 사관은 말하기를 공의 사람됨은 상세하고 분명하며 그 정밀함이 어느신료들 보다 월등하며 비록 원상이라 할 지라도 무릇 난처한 일이 생기면 반드시 공에게 물었다고 할 정도로 전고에 밝으시었다.
연산즉위(燕山卽位)년 4월 壬午에는 成宗實錄 지관사로 왕명을 받아 실록편찬을 하시고 연산원년 10월 丙申 승직 숭록대부 우찬성으로 2년 10월 乙卯에는 의정부 좌찬성으로 이배(移配)되시며 겸하여 세자이사(世子貳師) 판의금부사, 영경연사, 감춘추관사를 겸하시었다.
내시(內侍)가 정치에 간여함을 不可하다고 지적하시고 성종께서 정전(正殿)에 납시지 못하게 되면 혹은 편전에서 혹은 밤의 소대에서 하루도 태만한 적이 없었습니다. 殿下 또한 이렇게 해야합니다. 대간의 파직은 절대로 불가하며 서경에 이르기를 근거없는 말을 듣지 않고 묻지도 말고 모계는 쓰지 말라 하였는데 人心은 위태롭고 盜心은 적음을 말하며 마음을 보존하고 정치하는 근본을 밝혔고 여기서는 또 이것을 말하며 政治하는 要結을 밝힌 것이니 제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도가 모두 여기에 있습니다 하고 극간하시며 또한 서얼의 자손이 과거에 응시 할 수 있게 하고 어린 과녀(寡女)의 재가(再嫁)를 허가해 주길 청하는 諫言을 진언하시고 또한 마음에는 아무리 聖人 일지라도 생각이 없으면 狂이 되며 一念의 차는 천리나 틀린다 여긴 것이 옵니다. 바라옵 건데 전하께서는 깊이 대우가 진계한 말을 신이 광고함을 용서하시오면 아름다운 말이 묻혀지는 바 없으며 聖德은 더욱 高名하여 질 것이니 어찌 사기가 그 사이에 낄 수가 있으리까? 아! 忠誠스런 말과 아름다운 정책이 아마도 날마다 전하앞에 전달되고 있을 것이오니 신이 논한 바 같은 것은 眞實로 조금의 도움도 되지 못할 것이 오나 정성이 속으로 격동하여 스스 로 억제하지 못하옵고 감히 비희를 다하여 죽음을 무릅쓰고 간합니다 하며 연산군의 폭정을 논하시고 또한 사치를 금지할 20개 절목을 올려 극간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았다.
戊午年 사화에 피화당하여 파직되었으나 동년 12월 癸丑 충훈부 광원군으로 복관되시고 7년 4월 壬辰에 새로 설치된 공안 상정청 감사직을 받으시고 동년 6월 己亥 숭록대부 행 병조판서겸 관상감사를 제수 받았다. 연산 9년 1월 사직 상소를 올려 윤허를 받았으나 명사 관반으로 있다가 동년 2월 甲子에 돌아가시니 享年 69세이시다. 왕이 전지를 내려 좌찬성 윤효손으로 하여금 치제케하니 그 제문은 대략 당나라의 일람이 없어졌고 한나라의 삼노를 잃었도다.
슬픔은 士林에 얽히고 아픔은 동료간에 깊도다. 하여 온 유림과 조정이 슬퍼하며 예장하였다.
己亥 同生 극균(克均) 조카 세좌(世佐)가 갑자사화에 피화(被禍)됨으로 이에 연좌되어 삭탈관직 되었으나 중종(中宗) 2년 설원 복관되었고 왕이 禮曹에 지시하여 공신치제(功臣致祭)를 하게 하였다. 연산 戊午년일을 사간이 충의 무리들이 무고로 고신 3등을 추탈하였으나 셋째 아드님 세정(世貞)의 상소로 직첩이 환급되고 무오년일에 대한 추론을 못하게 하였다. 시호는 익평(翼平) 사려심원(思慮深遠)을 익이라 하고 집사유제(執事有制)를 평이라 하니 宣祖때 세사부조지전을 받으시니 묘소는 城南 上大院 祖考右岡이시고 사묘(社廟)는 수원 파장동이시다.
配位 貞敬夫人 安東權氏로 醴曹參判 지(至)의 따님이시다. 큰아들 세전(世銓)은 文科出身으로 사헌부집의, 도호부사로 贈醴曹參判이시고 둘째 세경(世卿)은 文科 첨정(僉正)이고 셋째는 세정(世貞)으로 문과출신이시고 五曹參議 全羅觀察使를 역임하고 넷째는 세륜(世綸)으로 武科출신으로 兵曹參議 훈련원 도정을 역임하고 다섯째 蔭職 奉事를 한 세응(世應)이고 여섯째는 세규(世規) 일곱째는 세진(世珍) 여덟째는 세희(世熙)이시다. 첫째 따님은 牧使 송수(宋壽)에게 출가하니 여산인이고 둘째따님은 노찬(盧瓚)에 出家하셨다.
아 ! 빛나도다 광주이씨 후손(後孫)이요
영가(永嘉)의 교목(喬木)으로 해동(海東)에 우뚝하니
빛나는 업적(業績)이 연속하여 덕음(德音)으로 무성하니
다투어 문장을 지으면 태산북두(泰山北斗)처럼 지어내고
또한 충절(忠節)에 있어서도 주금(株金)에 상당하리
위봉(威鳳)의 새끼를 낳으니 항상 오색영롱하고
예장(豫章)에 싹은 자라서도 천 길이나 되노라
공께서 처음부터 글을 읽을 때 두각(頭角)을 나타냈고
재주를 갈고 닦음에 청금에 뛰어났네
집에 봉군(封君) 五人은 예로부터 드문 일이고
윤음을 초한 것 광채(光彩)비추어 문성(文星)을 움직이었네
영웅호걸(英雄豪傑)은 본시 경제(經濟)를 펴는 것인데
머리를 돌려 온화하게 운음(雲陰)을 가르네
기린각(麒麟閣)의 옛그림빛이 응당 바래졌고
대려의 새로운 공훈(功勳) 권우(眷佑) 더욱더 깊었노라
남해의 소리는 붉은 경금을 본땄도다
눈을 씻고 얼마나 많이 청사(靑史)를 붙잡았던고
이름은 천지(天地)를 경륜(經綸)한 뒤 높아지고
생각은 연운(煙雲)이 변화하는 가운데에도 우뚝하네
경덕(敬德)이 날로 오르니 어찌 조금의 겨를이 있으며
현인(賢人)을 하늘이 내시니 재주 또한 많으셨네
어조(魚藻)의 영광스러운 즐김은 옛적에 빛났으며
운대(雲臺)의 성대한 아름다움 지금까지 빛나네
훈계(訓戒)펴보자 글자마다 가르치심에 공경(恭敬)함이 동하고
간엄(簡嚴)함은 삼풍(三風)의 훈계(訓戒)보다 훨씬 뛰어났네
성상(聖上)의 물으심 깊이 치도(治道)의 어려움을 알아
아는 사람은 지금도 제요(帝堯)의 어려움을 믿노라
사봉(四峰)께서는 갑자기 서산(西山)밖으로 향하시니
삼한(三韓)의 억조창생(億兆蒼生) 모두 옷깃을 적셨네
혁혁한 높은 공은 옛날에도 드물었는데
높고 높으신 성덕(聖德) 오늘에서야 칭송받네
은혜(恩惠)가 자극(紫極)에 트여 후세(後世)에 빛나고
삼광(三光)이 밝게 빛나니 음촌(陰村)을 짝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