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원군 익평공 극돈의 장자로 세조2년 1456년 출생하셨다. 성종14년 1483년 계묘년에 문과에 오르시니 당년 18세이셨다.
지평, 정언, 장령, 집의를 거쳐 통정대부 장단도호부사를 역임하였다. 공께서는 연산10년(1504년) 갑자사화에 유배되었다가 유배지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49세였다. 중종반정으로 중종 원년 1504년 예조참판으로 증직되었다. 공의 성품은 부친의 성품을 이어 받아 강직.검소하고 항상 근신하며 책을 손에 놓지 않았다. 배위로는 증 정부인 양성 이씨로 현감 질의 따님이시다. 묘소는 과천 삼현 쌍분이다.
숙종 경종 때 문인. 광원군의 8대손 숙종 정해문과 장원관은 장령, 집의, 호조, 병조참의 이조참판에 이르렀으나 광창부원군의 일로 많은 탄핵을 받고 은거하였다.
영조 갑오 3월 4일생 순조 계유 2월 7일 졸
영,정조 때 무인. 이조참판 운근의 고손
20세 무과 급제. 부녕군수, 순천영장, 온성 병마절제사, 길주목사 등을 거치어 가선대부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겸 삼도수사를 겸하였다.
증 승정대부 병조판서 증시 경절공을 받았다.
광원군 이자이며 성종11년 병과에 급제하여 돈녕부 첨정, 봉정대부 사헌부 장령을 지냈다. 배위로는 숙인 안동권씨이다. 묘소는 광주 대원리 쌍분이다.
첨정공 세경의 장자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내한교리를 지냈고 증직으로 대광보국 숭록대부 영의정겸 영경연 보문각 대제학 동지돈녕부사 오위도 총부 도총관을 증직하였다. 배위로는 정경부인 전주이씨이다.
광원군의 삼자이며 세조7년 신사 1461년 5월 21일 출생하였으며 성종21년 음사로 와서 별제를 거쳐 내자사주부로 장악주부 사헌부감찰 장례원사평 충훈부경력을 지냈다. 연산7년 1501년 문과에 급제하여 옥당에 뽑혔으며 사헌부장령 군기지 첨정 승문원 참교 세자 시강덕 보덕을 거쳐 연산9년 계해에 통정대부 병조참의를 지냈다. 연산십년 1504년 갑자사화에 남해로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으로 중종원년 1506년 유배에서 풀려 서울로 돌아와 예조, 병조참의를 거쳐 전주부윤 해주목사를 거쳐 전라도관찰사를 거쳐 첨지중추부사에 전임 중종19년 1524년에 승정원 좌승지에 이어 도승지로 승진되었다. 이듬해 예조, 병조, 형조등 3조 참의를 지내던 중 모친상을 당하여 슬퍼한 나머지 병을 얻어 위독한 상태에서 자손들만 모아 놓고 「내가 이미 장례를 모셨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지만 다만 앞으로 제사에는 유과를 쓰지 말고 장례에는 채색된 비단을 쓰지마라. 」유언하니 향년 63세이다. 하대원 선영의 옆에 안장하였다. 배위는 정부인 전주이씨이며 종실 예천군 천의 따님이고 효령대군 보의 증손녀이다. 중종27년에 돌아가시니 향년 71세이며 쌍분이다.
세정의 고손이고 수완이 증손이다. 선조8년 1575년 출생하여 선조36년 1603년 무과급제하고 훈련원선전관을 거쳐 광해조때는 곡산군수, 가산군수 강계부사를 역임하였다. 인조5년 정묘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 북방일대가 침략당하자 공은 53세로 병마절도사 남이흥의 별장이 되어 장병을 거느니고 안주성으로 향하였다.
그 때 안주성이 급급하다는 연락을 받고 후퇴하려 하였으나 공은 적의 협공을 받아 격퇴할 것을 맹서하고 장병을 진두지휘하여 안주성에 이르러 결사적으로 전투를 별여 선봉장인 공을 위시하여 단 한명의 생존자도 없이 모두 전사하였다. 조정에서는 공의 충절을 알고서 우찬성의 증직을 내렸으며 시호를 공민이라하고 충열각이 내렸으며 안주 충열사에 배양되었다. 배위로는 정부인 청주한씨이고 묘소는 하대원동에 있으며 쌍분이다. 부군은 의관장이다.
광원군의 손자이고 세정의 오자이다. 연산6년 1500년에 출생하였다. 중종26년 신묘1531년 31세때 사마시에 합격하여 곡성.임실.구례.장성현감을 역임하였다. 벼슬은 내첨사 판관에 이르렀다. 몸소사화를 겪음으로 일찍 은퇴의사를 갖고 은퇴하여 퇴계 이황, 율곡 이이, 황간 김계희선생과 같이 정자를 호서에 짓고 도학과 성리학을 강론하니 여러선생들이 친구로 대접하였다. 해동록에 지재된 바에 의하면 5현정 옛터는 알수가 없다. 만년에 호남 보성의 대곡에 자리잡고 퇴거하니 보성입향조이시다. 1573년 2월 10일 별세하니 향수 73세이다.
배위로는 숙인 전주이씨로 임성부수 언정의 따님이다. 묘소는 보성 수남리며 합장이다.
광원군의 제 4자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의정부검상과 사인을 거쳐 통정대부 병조참의 훈령원도정으로 승진되었고 자헌대부 이조판서겸 예문관 홍문관 대제학 지춘추관사를 증직하였다. 배위로는 정경부인 전주최씨이다.
수헌의 아드님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전라도, 평안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으며 가선대부 병조참판 동지돈녕부사겸 오위도총부 부총관 훈련원도정 관서부원수를 지냈다. 증직으로 대광보덕 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 춘추관 관상감사를 받았다.
시호는 장열이며 영의정 유척기가 신도비문을 지었다.
광원군의 오대손이며 도정공 세윤의 현손이다. 선조 임오 1582년에 태어났으며 무과에 급제하였다. 광해조 때 훈련대장이었다. 이때에 김류, 이귀 등이 반정을 음모할 때 경립이 많은 군사를 가지고 성과 대궐을 지키므로 이귀가 경립과 같은 마을에 살고 있어 교분은 있었으나 광해군과 사돈인 박승종과 경립 역시 사돈간으로 말을 못했다. (이때에 광해군의 왕세자비는 박승종의 손녀딸이자 이이첨의 외손녀였다.) 이때 반정 주역중 장유가 동생 장신을 시켜 말했다. 장신은 경립의 사위였다. 흥립이 장신에게 묻길 이귀 역시 이번 반정에 참여하였나를 묻자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러면 이번 의거는 꼭 성공할 것이다 하고 반정에 참여할 것을 허락하였다. 반정의 날 의군이 진군하여 창덕궁 문밖에 이르니 흥립은 도감의 병졸을 이끌고 궐문, 동구에 진치고 감히 대항하지 않아 의군을 맞아들여 인정전을 점령하고 일등훈으로 자헌대부에 가자되고 광천군에 훈봉되었다. 이듬해 이괄란때 공은 수원부사겸 경기방어사가 되었으나 이괄군에 패하자 책임을 물어 투옥하자 자책을 느끼고 자결하였다. 배위는 밀양박씨이다.